편집자주‘정치X파일’은 한국 정치의 선거 결과와 사건·사고에 기록된 ‘역대급 사연’을 전하는 연재 기획물입니다.
“골프와 선거는 고개 들면 진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야권 일각에서 떠오르고 있는 ‘총선 200석’ 주장에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골프 관련 언급은 평소 박지원 전 원장의 지론이다. 골프 스윙할 때 공이 가는 방향을 보겠다고 고개를 들다가는 제대로 맞추지도 못해 낭패를 본다는 얘기다.
끝까지 공을 보고 임팩트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한 뒤 고개를 드는 게 정타 확률을 높이는 선택이다. 프로 선수들은 그렇게 끝까지 공을 보면서 스윙하는데 대부분의 아마추어 선수들은 너무 빨리 고개를 들어 부정확한 샷의 위험성을 높인다.
골프의 교훈은 선거에도 활용된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섣불리 고개를 들면 역풍을 자초할 수 있다는 게 박지원 전 원장이 평소에 하는 말이다. 총선 200석 주장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예상보다 큰 득표율 차이로 승리한 이후 번지고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도 200석을 언급한 바 있다. 희망이 섞인 주장이었지만, 200석 언급이 나온 이후 정가의 관심은 뜨거웠다. 선거의 금기어인 200석 언급의 경솔함에 관한 지적이었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위기가 몰려오는데도 200석 압승론을 떠드는 정신 나간 인사들도 있다”고 직격했다.
김두관 의원의 지적은 특정 인사를 겨냥한 발언이라기보다는 민주당 전반에 경고음을 전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한쪽에서는 총선 낙관론이 번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러다가 큰일이 난다고 우려하는 상황. 이는 국회의원 200석을 둘러싼 정가의 오래된 ‘터부’와 관련이 있다.
200석 획득 이슈는 특정 정당의 압승 흐름이 감지될 때마다 관심의 대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제17대 총선이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열린우리당이 200석을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수도권은 물론이고 대구·경북도 탄핵 역풍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면서 열린우리당이 초강세 흐름을 형성했다. 그러나 정치 전문가들은 여론조사와 실제 선거 결과를 다를 것이라면서 신중론에 무게를 실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이러다 200석을 넘겨줄 수도 있다면서 영남권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지지층을 향해 읍소했다. 무릎을 꿇고 우리가 잘못했으니 이번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면서 호소했다. 이른바 읍소 전략은 어느 정도 통했다.
실제 총선 결과는 열린우리당이 152석, 한나라당은 121석으로 끝이 났다. 한나라당은 예상보다 선전했고, 열린우리당은 다소 아쉬운 성적표를 남겼다.
2008년 제18대 총선 때는 거꾸로 한나라당을 비롯한 범보수 진영에서 200석을 넘어설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대선 직후 열리는 총선이었는데, 당시 통합민주당은 대선 참패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한나라당이 공천 파동을 겪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은 153석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원내 제1당 탈환에 성공했지만, 애초 기대보다는 저조한 총선 성적표였다.
정치권에서 200석을 금기어 취급하는 것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결과를 미리 정해놓은 듯한 태도가 유권자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는 오만한 자세로 비칠 수 있고, 선거에서는 악재 요인이다.
그래서 선거 흐름이 불리한 쪽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200석이 현실화하기 어려운데도 엄살을 부리면서 자기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하는 소재로 활용한다는 얘기다.
내년 4월10일 열리는 제22대 총선은 어떻게 될까.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이 다소 앞서거나(ARS 여론조사), 국민의힘과 비슷한(전화면접 여론조사) 지지율을 보인다. 그런데도 야권은 물론 여권 일각에서도 여당이 쉽지 않은 선거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어떤 정당이 제1당이 될 것이냐, 어떤 정당을 총선 때 지지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는 국민의힘이 고전하는 여론조사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회의원 200석 확보는 가능할까. 사실상 정치인의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야당이 200석을 확보하려면 수도권, 호남, 충청권 압승은 물론이고 거대한 산을 두 개나 더 넘어야 한다. 현재의 선거제를 민주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정하는 게 그중 하나다. 또 하나는 총선 약세 지역인 영남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하는 선전의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부산, 대구, 울산, 경북, 경남 등 영남권 지역구 65석 가운데 3분의 1 정도의 의석은 확보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구와 경북에서 민주당이 의석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현실을 고려한다면 부산, 울산, 경남에서 절반의 의석을 확보해야 가능한 시나리오다.
정치인들의 입에서 200석 언급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 될 수 있다.
내년 4월 총선은 아직 ‘게임의 룰’도 확정되지 않았다. 여야가 어떻게 선거를 치를지를 좌우하는 선거 구도 역시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총선 흐름에 영향을 줄 변수는 하나둘이 아니다. 내년 총선까지 남은 5개월은 여러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다.
류정민 기자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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