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효율성(efficiency)보다는 평등(equality)과 공정성(fairness)을 더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특히 코로나 기간 우리의 정책 결정에 많은 제약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국가가 기본적으로 일시불 지급(lump sum transfers)과 경제학적으로 포퓰리스트 정책(populist policies)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를 효율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되돌리는 게 정말 어렵네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근 자신의 ‘멘토’인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전 미국 재무장관)와의 대담을 통해 털어놓은 고충이다. 이 총재는 지난 6일 한은 콘퍼런스홀에서 열린 월드뱅크(WB) 공동주최 서울포럼에서 1시간 남짓 이뤄졌던 서머스 교수와의 화상 대담에서 마지막 질문으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하며 “전 세계의 정책 입안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가이드를 달라”고 조언을 구했다.
서머스 교수는 이 총재가 “100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5분 대화하는 게 더 인사이트 있다”고 거듭 강조할 정도로 존경하는 학자다. 이 총재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갔는데, 당시 그의 지도교수가 바로 서머스 교수다. 이 총재는 서머스 교수의 애제자로 둘 사이는 각별하다.
이날 서머스 교수는 이 총재의 질문을 듣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건 1960년 이후 한국이 이룩한 놀라운 변화를 더 많은 사회가 누릴 수 있느냐는 것”이라며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느린 에스컬레이터보다 빠른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한다는 점을 거시경제학자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국전쟁 직후 60달러를 간신히 넘겼던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50년 만에 1만 달러를 넘어서며 ‘한강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렸는데, 아직은 우리 사회가 이러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는 근육을 단련할 때라는 의견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조언을 들은 이 총재는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 있는 동안 명심하겠다”고 답했다. 우리나라도 아직 성장 근육을 키워야 할 때라는 이 총재 본인의 생각을 석학의 입을 빌어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한은 관계자는 “쉽게 말해 지금은 ‘성장’과 ‘분배’ 중에 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성장에 힘을 실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들린다”고 말했다. 특히 내년 초께 한은이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는 우리나라 잠재성장률(국가의 노동·자본 등 동원 가능한 생산요소를 전부 투입해 부작용 없이 최대로 이룰 수 있는 성장률) 추정치는 1%대까지 하락할 거라 점쳐지고 있는데, 이게 이 총재의 요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라는 점도 이런 풀이를 뒷받침한다.
이 총재는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저성장 시대가 시작될 거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계속 나오고 있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구조조정을 통해 탈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해서 던지고 있다. 구조개혁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던 이 총재는 지난달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도 “노동시장 (개혁), 지식 증진, 경쟁 촉진, 여성·해외노동자 활용 등의 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률) 목표를 2% 이상으로 하고 싶다. 그래야 우리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서머스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결국에는 통화·재정정책을 통한 일시적 ‘펌핑’ 효과가 아니라 구조개혁을 통한 근본적인 성장 근육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 거라 볼 수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위기 때 경기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늘린 재정지출은 물가를 상승시키는 요인이 돼 한은 총재로서 통화정책을 운용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오른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한은은 0.5%까지 떨어졌던 기준금리를 10차례에 걸쳐 3.5%까지 끌어올렸으나 물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상황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확보하려면 국가부채를 더 이상 늘리면 안 되는데, 요즘 재정지출을 늘려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며 “그게 아닌 다른 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진심을 함축해 드러낸 듯하다”고 설명했다. 석 교수는 “팬데믹 당시 늘렸던 재정지출을 정상화시켜야 하는데, 한 번 늘린 의무지출 비중 등을 다시 줄이기는 현실적으로 너무 힘든 일이라 그런 점을 함께 지적한 것 같다”고 부연했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도 “한국처럼 대외 개방도가 높은 나라가 세계 경제가 안 좋은 상황에서 돈을 좀 더 쓰고 찍어봤자 성장률을 단기적으로 찔끔 올리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는 건 글로벌 컨센서스”라며 “지금 통화정책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긴축적으로 가고, 재정은 아껴 쓰면서 구조개혁을 충실히 이행해 경제 자체의 체질을 변화시켜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계속 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유진 기자 geni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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