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고통만 가중한다며 연명치료를 거부당한 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긴급 시민권을 부여받아 치료를 이어가려 했던 영국 아기가 끝내 숨졌다.
1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에 따르면, 희소병에 걸린 영국 아기 인디 그레고리가 8개월의 짧은 생을 뒤로 하고 숨을 거뒀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지난 2월 태어난 그레고리는 희소병으로 알려진 퇴행성 미토콘드리아 병을 앓았다. 그레고리는 태어나자마자 영국 노팅엄에 있는 퀸스 메디컬센터에 입원해 집중 치료를 받아왔으나, 병원 측은 지난 9월 불치병 판정을 내리며 연명치료 중단을 권고했다. 더 이상의 치료는 아기에게 고통만 안길 뿐 무의미한 일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레고리의 부모는 딸의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며 치료를 요구하면서 병원을 상대로 법정 투쟁을 했다. 영국 법원은 지난달, 치료 가능성이 없다며 의료진의 손을 들어줬다.
부모는 판결해 불복해 항소했지만, 항소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부모는 유럽인권재판소에도 제소했지만, 유럽인권재판소(ECHR)는 생명유지장치 중단을 금지하지 않을 것이며 영국 법원의 판결에 항소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지난달 30일, 교황청이 운영하는 이탈리아 로마의 아동 전문병원인 제수 밤비노 병원이 그레고리의 치료를 돕겠다고 나섰다. 이어 지난 6일 이탈리아 정부는 긴급 내각 회의를 소집해, 몇 분 만에 그레고리에게 이탈리아 시민권을 발급했다.
당시 이탈리아 멜로니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그들은 그레고리에게 희망이 별로 없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아기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는 부모의 권리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시민권이 부여되면서 그레고리의 법적 대리인이 된 이탈리아 영사관은 그레고리가 로마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영국 법원에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0일 그레고리를 이탈리아로 옮기는 것은 아기에게 최선의 선택이 아니며, 추가 치료는 아이의 고통만 가중하므로 연명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또한 연명 치료 중단은 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만 가능하다며, 집에서 죽음을 맞게 해달라는 그레고리 부모의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일 그레고리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져 생명 유지 장치가 제거됐고, 그로부터 약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레고리의 아버지 딘은 이날 성명을 내고 “인디가 새벽 1시 45분에 세상을 떠났다. (아기의 어머니) 클레어와 나는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프고 부끄럽다”며 “국가보건서비스(NHS)와 법원은 그레고리가 더 오래 살 기회뿐만 아니라,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을 존엄성도 빼앗아 갔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에도 영국에서는 23개월 아기 알피 에번스의 연명치료를 두고 유사한 논쟁이 있었다. 당시에도 로마 제수 밤비노 병원이 연명치료 지원 의사를 밝히자 이탈리아 정부가 에번스에게 시민권을 발급하고 이송 준비 등의 조처를 했으나, 영국 법원은 에번스의 이송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에번스는 생명 유지 장치를 제거했고, 닷새 만에 사망했다.
김현정 기자 kimhj202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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