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몰하는 작은 배처럼 위태로운 내 삶에 오직 한 사람만이 곁을 지켰습니다. 제 아내죠. 그녀는 용감하고 단호하게 희망의 새 돛을 펼쳤습니다.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인물이자 메르세데스-벤츠그룹의 설립자 칼 벤츠가 회고록에 남긴 말입니다. 사업적으로 어려운 시절, 원망 아닌 사랑을 준 아내 베르타 벤츠를 잊지 않고 고마워한 거죠. 단순히 어려운 시기를 같이 견뎠다는 ‘동지애’뿐만은 아닙니다. 만약 베르타가 없었다면, 자동차 산업 발전도 지금보다 더 늦어졌을 거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베르타는 남편이 개발한 자동차를 보완해주는 기술자이자 또 홍보해준 마케터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다른 가정환경
부모의 결혼반대에도
지참금으로 투자단행
칼은 기관사 아버지 밑에서 1844년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가 두 살 때 아버지는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죠. 그러면서 가정 형편도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베르타는 1849년생 부유한 집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접점이 없던 둘은 한 사교 모임서 처음 만났습니다. 남성들은 여성이 타고 있는 여러 마차에 오르내리며 결혼 상대를 찾는 행사였다고 합니다. 베르타가 탄 마차에 칼이 오른 겁니다. 남루한 옷에 수줍은 많은 칼의 모습에 베르타는 사랑에 빠집니다.
베르타와 칼의 연애가 시작되자, 베르타 부모님은 둘의 관계를 반대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변변찮은 직업, 내성적인 성격까지 부모 입장에서 딸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베르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처럼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얘기하는 칼에게 반한 거죠. 결혼 반대에도 베르타는 아버지께 결혼 지참금을 미리 받아, 칼 사업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부모가 반대하는 이와 금전 관계를 맺어, 연을 쉽게 끊을 수 없게 단단히 묶어둔 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업이 잘됐던 건 아닙니다. 칼은 동업자와 갈등으로 아내의 결혼 지참금까지 들어간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남들이 봤을 때 결혼 전 부모의 걱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려운 삶이기도 했습니다.
다섯 아이를 먹여 살리기 위해, 칼은 뭐든 해야 했습니다. 자전거 수리점을 운영하는 친구와 함께, 새 회사를 차렸죠. 결혼 후 11년이 지났을 때 일입니다. 이회사가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메르세데스-벤츠의 기원입니다.
칼은 자전거 기술자와 함께 내연기관에 자전거 동력 전달 기술을 접목,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했습니다. ‘가솔린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로 회사 설립 4년 만에 특허를 받기도 했죠. 하지만 기술적 성공이 사업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말 없는 마차를 개발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 자동차를 선보였지만, 벽에 부딪히는 등 웃음거리만 됐죠.
내성적인 칼은 많은 이들의 혹평에 상심했고, 개량된 모델들도 사람들 앞에 선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지금까지 자동차 개발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꿈을 잃어가는 게 칼을 더 힘들게 했죠.
남편 꿈 찾아준 아내의 믿음
사업 전환점 된 친정투어?!
연구·개발 과정을 쭉 지켜봤던 베르타는 남편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88년 8월 5일, 베르타는 역사적인 일을 단행합니다. 이른 새벽 남편 모르게, 남편이 만든 자동차를 끌고 두 아들과 함께 친정에 다녀오기로 한 거죠. 차를 밀고 나와 집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첫 시동을 걸었는데, 남편이 잠에서 깨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날 남편이 잠에서 깨었다면, 또 아내의 ‘친정투어’를 반대해 못가게 했다면 지금의 벤츠는 없었을 수 있습니다.
만하임에서 포르츠하임까지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곳까지 베르타는 달렸습니다. 당시 해당 제품의 최고 속도는 시속 16km로, 마차보다 조금 빠른 수준에 불과했죠. 더욱이 예비 연료와 두 아들까지 함께 탔으니 속도는 더 느렸습니다. 말 그대로 모험 그 자체였습니다. (이날 친정투어는 세계 최초자동차의 장거리 운전으로 기록 됩니다.)
자동차의 내구성도 문제였습니다. 냉각수가 떨어지면 개울물로 보충했고, 연료관이 막히면 머리에 하고 있던 머리핀으로 쑤셔 뚫었습니다. 점화플러그 전선이 손상됐을 때는 입고 있던 가터벨트를 풀러 묶었죠. 나무로 만든 브레이크가 마모됐을 때 가죽신을 사서 뜯어낸 가죽을 브레이크 패드로 활용했습니다. 추후 세계 최초의 브레이크 라이닝으로 기록됐죠. 도중에 연료가 떨어져 약국에서 리그로인(당시 의복의 기름때를 제거하는 세제로 쓰임)을 구매했는데, 이 약국 역시 예기치 않게 세계 최초의 주유소가 됐죠.
그날 저녁, 우여곡절 끝에 친정에 도착한 베르타는 남편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보를 보냈죠. 그리고 사흘 뒤, 베르타는 같은 방법, 다른 루트를 통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루트를 다르게 짠 이유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남편이 만든 자동차를 선보이기 위함이었죠. 엄마와 두 아들이 탄 말 없이 달리는 마차는 결국 입소문을 타게 됐죠.
집에 돌아온 베르타는 남편 칼에게, 자동차의 문제점을 하나씩 설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칼은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기 위해 브레이크 성능을 키우는 등 아내가 지적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시작했습니다. 꿈을 잃어가던 남자가, 아내 덕분에 꿈을 다시 되찾은 겁니다. 베르타는 뿐만 아니라 런던과 파리, 베를린 등 유럽 각국을 비롯해 미국 뉴욕 신문사에도 전보를 보내 자동차 여행 성공을 알렸죠. 그렇게 쓰러질뻔한 회사는, 칼이 꿈을 되찾은 것처럼 다시 살아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1929년 4월 칼은 자택에서 아내 베르타의 배웅을 받으며 84세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15년 뒤인 1944년 5월 베르타도 남편을 따라 눈을 감았습니다. 자동차 역사에 있어 늘 남자가 대부분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최초의 자동차 여행자는 한 남자의 아내, 또 아이의 엄마 그리고 용기 있는 여성 베르타였습니다. 베르타는 단순 자동차 여행자가 아닌 테크니션이기도 했습니다. 칼은 베르타를 만나, 베르타는 칼을 만나면서 결국 지금의 벤츠도 있게 된 거죠. 벤츠의 엄빠(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두 사람의 사랑이 결과적으로 일류 기업의 출발점이 된 셈이기도 합니다.
썸랩 윤정선 에디터(sum-la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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