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한국 사회 일면의 민낯을 조명한 소설이다. 배경은 익명 직장인 커뮤니티. 커뮤니티에는 “결혼할 사람 스펙 평가 부탁드립니다. 이 정도면 누가 더 아까운가요?” 등의 질문이 난무한다. 소설은 이런 상황을 통해 타인과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 메말라 팍팍해진 현대인 삶을 조명한다. 최소한 ‘남들처럼’이라는 모호한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박탈감으로 신음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학습·전파하는 ‘정상성(Normality)’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소설 영문판은 독립출판물로는 이례적으로 미국 유명 서평지 ‘커커스 리뷰(Kirkus Reviews)에 올라 “묘사가 놀랍도록 치밀하다”고 호평받았다.
바디 프로필, 클라이밍, 러닝, 오늘은 운동 완료, 독서 일기, 예쁜 장소, 좋은 음식… 멋지고 화려한 삶의 파편들이 눈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던 찰리 채플린이 SNS를 했다면 무슨 글을 올렸을까? 지쳐서 벌러덩 누워있는 나는 강 아래로 떠내려가는 뗏목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나만의 이 허름한 공간에서조차 SNS 너머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뗏목이 떠내려가지 않게 열심히 러닝머신 위에서 노를 저어야 한다. 그래, 뛰어야지. 버리면 조금 아까울 신발과 트레이닝복을 입고 뛰어야지. 오늘 해야 할 ‘인증’을 위해서라도 뛰어야지.
“너희의 풀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강의실에는 샤프심 부러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싱긋이 웃던 뒷자리 학생들도 침묵에 덮인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너네, 나중에 수능 시험장에서 이렇게 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1년 더해. 1년 더하고, 남들 대학교에서 제일 빛나는 청춘을 즐기고 있을 때, 너희는 방구석에서 1년을 더해야 한다고. 너희 인생은 그날 성적표에 따라 니들 남은 인생이 결정된다고, 알겠니 영백아?”
인사를 받은 그녀가 손목시계를 쳐다본다. “네…뭐 타고 오셨어요?” 가슴 한가운데에 기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한 간단한 질문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차량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질문인지 서너 번 데이고 나서야 알았다.
왜 우리 회사만 가지고 그래? 미공개정보? 다들 그렇게 하는 거 아냐? 어차피 몇 달만 지나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차명으로 다 해놨는데 걸리겠냐? 니들이 열등감으로 인터넷에 잔뜩 비난해도 난 스톡옵션 받고 투기하면서 정년까지 다닐 거다. 누가 그런 회사들 다니라고 칼로 협박했니? 억울하면 니들도 공부 열심히 하던가? 생각하는 것들 하고는…
지금 이 일을 할 시간에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몇 번만 주고받으면 월급을 벌 수 있다. 나는 바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나는 바보다. 동영상 플랫폼 저 너머, 일찌감치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들이 나를 꾸짖는다. 직장인으로 살면 바보라는 수많은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성실하게 일만 하는 우리 팀, 우리 회사 동료들은 바보다.
이거 할 말 많습니다. 요즘 청년들, 집을 못 구해요? 부동산도 조금만 공부하면 할 수 있는데, 공부를 안 합니다. 다들 연애나 하고 돌아다니느라 바빠서 그런 거지. 이게 다 나약한 정신력 때문에 그래요. 가난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성입니다.
맹인의 거울 | 정무 지음 | 메트릭 | 212쪽 | 1만67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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