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만3750석, 만원 관중의 함성이 빠져나간 자리. 2023 KBO리그 한국시리즈 무대였던 잠실야구장은 정적에 휩싸인다. 흙먼지만 쓸쓸하게 남겨 놓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라운드는 그 자체로 야구라는 서사(敍事)를 전하는 기록지다. 수많은 이가 오고 간 흔적에 땀의 결과물이 켜켜이 새겨져 있다.
바둑도 마찬가지다. 가로 19줄, 세로 19줄 등 361개의 교차점에 놓이는 흑돌과 백돌. 그들의 어울림에는 사연이 있다. 곁에 백돌이 있는지, 흑돌이 있는지, 서로 연결이 돼 있는지에 따라 바둑의 서사는 달라진다.
반상(盤上)에 놓인 돌의 조합은 치열한 두뇌 회전의 결과물이다. 각자의 전략에 따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타협이 만들어지며, 생과 사가 결정된다. 그렇게 놓인 돌이 걷어지고 반상이 비워진다고 해서 바둑이라는 서사가 사라지겠는가.
바둑과 야구는 공통점이 없는 종목처럼 보이지만, 묘하게 닮았다.
승과 패라는 결과에만 집착하면 바둑과 야구의 진정한 묘미를 느낄 수 없다. 바둑돌의 놓임도 야구장 그라운드에 새겨진 발걸음의 흔적도 저마다 사연이 있는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 결정의 무게를 존중하고 가치를 부여할 때 발전이라는 과실(果實)이 뒤따른다.
패배로 끝이 났다고 지난 일에 관한 복기(復棋)를 게을리하는 것은 어리석다. 야구에서 패배한 팀의 수장은 왜 그러한 결과가 나왔는지, 1회부터 9회까지 복기할 필요가 있다. 적재적소에 선수를 기용했는지, 조바심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는 의미다.
바둑은 더 복기가 중요한 종목이다. 단 하나의 수가 전체 판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게 바둑이다. 그래서 더 신중하고 철저하게 착점해야 한다. 지나간 돌의 역사를 되짚으면서 그 선택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본다면 기력은 자연스럽게 향상된다.
슈퍼스타에 가려진 숨은 일꾼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점도 바둑과 야구의 공통점이다. 야구는 홈런을 치고, 삼진을 잡는 등 극적인 순간에 관심이 집중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화려한 그 결과물은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유인구를 참아내는 인내를 동반해야 한다. 상대 투수의 실투를 놓치지 않는 집중력이 바탕이 될 때 홈런도 기대할 수 있다.
바둑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묘수도 마찬가지다. 전세를 뒤집어 놓을 그 수가 통하려면 사전에 여러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상대를 궁지(窮地)에 모는 수순이 이어진 뒤에 판을 결정하는 회심의 일격도 통하지 않겠는가. 쓸모가 덜한 것처럼 보이는 어느 수가 사실은 승리로 인도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도 야구와 바둑의 닮은 점이다. 야구에서는 승부가 기울었을 때 지켜야 하는 불문율이라는 게 있다. 큰 점수로 이기는 팀이 2루 도루를 시도하는 것은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인식된다.
바둑도 상대의 패색이 짙을 때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하는 게 중요하다. 승리의 기쁨을 과하게 표출한다거나 상대를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금물이다.
품격을 잃지 않는 행동은 결국 자기의 승리를 더 값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패자(敗者)가 흔쾌히 결과를 받아들일 때 승자(勝者)의 기쁨도 배가되지 않겠는가.
류정민 이슈1팀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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