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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달 30일 신임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에 박춘섭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을 임명했다. 김대기 비서실장은 박 수석에 대해 “정통 경제 관료로서 재정·예산 전문가이면서 거시경제 전반에 대한 식견을 갖추고 있다”며 “경제 정책을 조율하고 경제 활력을 높이고 민생 안정을 도모해나갈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박 수석은 행정고시 31회로 기획예산처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을 거친 ‘예산통’이다. 대변인도 역임했다. 경제 관료로서의 전문성은 충분하지만 경제학계 안팎에서는 금통위원의 대통령실 직행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박 경제수석은 2018년 12월 조달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났다가 지난 해 6월 대한체육회 사무총장으로 복귀했다. 박 수석은 행시를 쳤지만 고시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윤 대통령과 알고 지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4월 금통위원에 취임했고 7개월 여 만에 대통령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단기 금통위원이다. 전직 고위관료는 “금통위원이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가면 옛날처럼 기재부 남대문 출장소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다”며 “대통령실로 바로 가는 것도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유는 이렇다. 금통위원을 경제부처 수장이나 대통령실에서 경제를 총괄하는 자리를 주게 되면 다른 금통위원들도 독립적인 의사결정보다 대통령실만 바라볼 수 있다. 금통위원을 하면서 다른 위원들과 알고 지냈기에 정부 측에 가서도 통화정책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통위원의 대통령실 직행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며 “금통위원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전문성과 독립성 때문인데 금통위원 하다가 바로 경제수석으로 가면 다른 금통위원들은 다 알던 분 아니냐. 통화정책에 영향을 미칠 개연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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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정부는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는다. 누구나 높은 금리를 원하지 않는다. 특히 한국은 금리가 높아지면 가계부채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부동산 경기가 급격히 추락한다. 이 때문에 선거에서 이기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중앙은행을 동원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이 경우 인플레이션과 경기 거품이라는 커다란 부작용을 떠안아야 한다. 더 의식적으로 정부와 중앙은행을 떼어 놓아야 한다는 이유다.
한국은행법 제3조는 한국은행의 통화신용정책은 중립적으로 수립되고 자율적으로 집행돼야 한다면서 한국은행의 자주성이 존중돼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러면서 금통위원의 임기를 4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의사에 반해 해임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전직 한은 고위관계자는 “금통위원 임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도중에 그것도 7개월 만에 가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며 “한은의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부분”이라고 전했다.
실제 금통위원의 경제수석 직행은 극히 이례적이다. 최소한 국민의 정부 이래 현직 금통위원이 경제수석으로 곧바로 옮긴 사례는 없다. 김대중 정부 김태동 초대 경제수석이 직을 마치고 한국금융학회 회장을 거쳐 금통위원을 맡은 적은 있다. 김중수 이명박 정부 초대 경제수석도 수석을 그만두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를 거쳐 한국은행 총재로 갔다.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에서 9년 넘게 이코노미스트로 일했던 김진일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 같은 접근이 너무 단편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어느 자리에서 바로 갔느냐를 따지기보다 실질적으로 어떻게 운영되느냐가 핵심”이라며 “미국만 해도 레이얼 브레이너드 전 연준 부의장이 백악관으로 바로 자리를 옮겼고 벤 버냉키도 백악관과 연준을 오가는 과정에서 말이 있었지만 연준이 (외부 영향과 관계없이) 제대로 운영되느냐, 그런 것이 더 중요하다”고 짚었다.
브레이너드 전 연준 부의장은 지난 2월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으로 직행했다. 당시 미 언론은 브레이너드가 백악관과 연준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으면서도 비둘기파였던 브레이너드가 연준에서 빠지면서 비둘기파의 힘이 약해지고 매파가 득세하는 것 아니냐는 쪽에 초점을 맞췄다. 외부 영향보다는 연준 내부의 역학 구도를 주목한 것이다.
디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해 ‘헬리콥터 벤’이라는 별명을 얻은 버냉키 전 의장만 해도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연준 이사로 있다가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으로 직행한 뒤 다시 2006년 연준 의장으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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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뒤로부터는 재정과 통화정책의 공조가 중요해졌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독립성도 독립성이지만 적절하고 유연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만 해도 매주 경제 부총리와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과 만난다. ‘F4(Finance 4)’ 모임이다. 이 총재는 최근 한은이 정부 측과 너무 자주 만나 독립성이 훼손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에 “한은이 좋은 정책 아이디어를 계속 얘기하면 정부가 들을 것 아니냐”며 “앞으로 정부에 한은 총재를 만나서 독립성이 사라지는 것 아니냐고 먼저 물어봤으면 좋겠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같은 맥락이라면 금통위원의 경제수석 직행도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좋을 수 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만 해도 겉으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조하지만 연준도 백악관과 의견을 나누고 정책을 공유하는 것은 매한가지”라며 “혼자만 중앙은행 독립성을 내세우는 것은 순진한 얘기”라고 평가했다.
다만, 박 수석이 금통위원 이임식에서 언급한 부분 가운데 일부가 한은에 신호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있다. 박 수석은 1일 “금리는 한은에 맡긴다”면서도 “(금통위원 재직 기간에) 통화정책 방향 회의를 다섯 번 했는데 기준금리를 동결하기만 했다. 물가가 안정됐으면 금리를 내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동결만 하다 가니까(아쉽다)”고 했다. 그는 또 “어제도 용산에서 동결만 하다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덧붙였다. 대통령실의 의중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꼴이다.
※‘김영필의 SIGNAL’은 서울경제신문의 자본시장 전문 매체 시그널(SIGNAL)을 통해 제공됩니다. 투자은행(IB) 업계의 이슈와 뒷이야기, 금융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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