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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계 극장가의 최고 화제작이라면 ‘바비(Barbie)’를 빼놓을 수 없다.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바비 인형들의 세계, ‘바비랜드’에 사는 바비가 현실 세계를 경험하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바비’는 페미니즘 논란을 비롯한 여러 구설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1조 9000억 원을 벌어들이며 코로나19 이후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바비 인형’ 하면 언뜻 완벽한 백인 여성 외모의 상징으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바비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 외에 여성의 선택지가 많지 않던 시절에 다양한 직업에 대한 소녀들의 꿈과 가능성을 투영하는 대상이었다. 인류 최초의 달 여행보다 4년이나 앞선 1965년 출시된 ‘우주비행사 바비’를 비롯해 외과 의사(1973년), CEO(1985년), 해군(1991년), 대통령 후보(1992년),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1998년) 등 바비가 가진 200여 개의 직업들은 늘 시대를 앞서갔다.
바비가 남성 중심의 직업 세계를 파고드는 사이 인간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바비가 태어난 1959년에 37% 수준이던 미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현재 57%가 넘는다. 바비보다는 늦었지만 1983년에는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가 탄생했고, 21세기 들어 여성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이 나왔다. 매출 상위 500개 기업인 ‘포춘 500’의 CEO 중 여성 비중은 올해 처음으로 10%를 돌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더디고, 어느 순간부터는 정체되거나 심지어 후퇴하기도 한다. 미국 여성들이 받는 임금은 같은 일을 하는 남성의 82% 수준이다. 65%에 그쳤던 40년 전에 비하면 커다란 발전이지만 남은 격차는 쉽게 메워지지 않고 있다. 골드만삭스·모건스탠리 등 월가 주요 은행들에서는 남녀 임금 격차가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능력주의에 가장 충실하다는 미국이 이 정도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은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래 줄곧 회원국들 중 성별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2021년 기준 남녀 임금 격차는 무려 31%로 OECD 평균(12%)을 크게 웃돌았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가 OECD 국가를 대상으로 여성이 직장에서 남성과 얼마나 동등한 대우를 받는지를 측정하는 ‘유리천장지수’ 순위에서 한국은 단골 꼴찌다.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차별 문제를 연구해온 클로디아 골딘 하버드대 교수는 남녀 간 임금 격차를 낳는 핵심 원인으로 ‘자녀’를 지목한다. 첫 출산 이후 육아 부담 때문에 수입이 줄어들고 승진이 가로막히는 이른바 ‘차일드 페널티(child penalty)’가 엄연히 존재하고, 장시간 근무에 매이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려운 고용 시장 구조가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처럼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온 불편한 진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골딘 교수는 올해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단독 수상했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도 출산과 ‘독박 육아’ 때문에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아예 커리어를 포기하는 여성이 지금도 부지기수다. 그로 인한 사회적 손실도 심각하지만, 유독 여성들에게만 ‘일이냐 가정이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기업 문화와 사회 분위기는 이제 부메랑이 돼 우리 사회의 존립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합계출산율 0.7명(올해 2분기)이라는 전무후무한 저출산 현상이 우리 사회를 소멸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출산·육아가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사회라면 아무리 그럴듯한 저출산 대책을 내놓아도 달라질 것이 없다. 최근 중앙노동위원회가 육아휴직한 여성을 파트장에서 일반 직원으로 강등한 사업주에 대해 ‘성차별’ 시정명령 판정을 내린 것은 고무적이면서도 씁쓸하다. 획기적 예산 지원으로 출산·육아 비용을 줄여주는 지원책도 분명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 ‘육아는 여성 몫’이라는 인식부터 바꾸고 남성 육아휴직 활성화, 근무시간 유연화 등 남녀가 육아의 책임을 나눠질 수 있는 제도를 조속히 정착시켜야 한다. 방 안의 코끼리를 내보내지 않는 한 저출산 극복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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