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한국은행이 19일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를 연 3.5%로 6연속 동결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 간 전쟁 변수가 돌출하고, 미국의 통화정책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만큼 금리를 묶어 향후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취지다.
특히 한·미 간 기준금리 격차 확대에 따른 우려가 있지만 국내 경기회복에 대한 불확실성이 큰 데다 금융이자 부담 증가로 금융불안을 키울 수 있어 추가 금리인상을 단행하기는 쉽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했다. 정부의 ‘상저하고’ 경기 전망과는 달리 4분기 들어 한국 경제의 회복 강도가 뚜렷하지 않고, 중국 경기침체 영향이 지속되면서 추가 긴축의 필요성을 낮춘 것으로 풀이된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19일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를 열고 기준금리 연 3.50% 동결을 금융통화위원 전원 일치로 결정했다. 지난 2월 금통위는 2021년 8월 이후 1년 6개월 동안 진행된 금리인상 행보를 중단했는데 직전 8월에 이어 이달까지 여섯 번 연속 동결 행보에 나선 것이다. 이날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미국(5.25~5.50%)과의 기준금리 격차는 상단 기준 역대 최대인 2.00%포인트를 유지했다.
금통위는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서 동결 배경에 대해 “물가상승률이 기조적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지만, 주요국 통화 긴축 기조 장기화, 지정학적 리스크 증대 등으로 물가와 성장 전망 경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물가상승률 둔화 속도가 예상보다 완만해질 것으로 전망되고, 가계부채의 증가 흐름도 지켜볼 필요가 있는 만큼 현재의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봤다”고 밝혔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말 3%대 초반으로 낮아지고 내년에도 완만한 둔화 흐름을 이어갈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높아진 국제유가와 환율의 파급영향,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등으로 물가의 상방 리스크가 높아짐에 따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목표 수준으로 수렴하는 시기가 당초 예상보다 늦춰질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금통위는 “근원물가도 수요압력 약화 등으로 기조적인 둔화 흐름을 이어가겠으나 누적된 비용 인상 압력의 파급영향 지속 등으로 둔화 속도는 당초 예상보다 완만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근원물가 추세적 하락…향후 국제유가가 변수
한은이 이달 금리 동결을 결정한 배경 중 하나는 최근 물가가 반등하기는 했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한은 전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어서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전년 동월 대비)이 3.7%로 오름세지만, 통화정책 효과를 보여주는 근원 소비자물가 지수는 3개월째 비슷한 수준으로 추세적인 하락세를 보이고 있어 현 기준금리가 긴축적인 수준임을 방증한다. 다만 최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국제유가 변동성이 심화, 물가를 다시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점은 변수다. 또 미국의 통화정책 불확실성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상태인데다 국내 경기 불안도 이어지고 있어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향후 물가경로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게 한은 입장이다.
최근 금융이자 부담이 급증하면서 가계부채 부실을 키울 우려가 있다는 점도 동결 이유로 꼽힌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계부채와 기업부채 연체율이 아직은 낮은 수준이라고 하지만 모든 대출의 연체율이 굉장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며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연체율 역시 빠른 속도로 늘고 있어 기준금리를 추가 인상하면 원금과 이자상환 부담이 커지고 연체율이 증가해 금융불안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소비와 투자를 동시에 줄여 경기침체를 더욱 부추기는 요소가 될 것이란 시각이다.
불황형 성장…하반기 성장률 회복이 관건
한은이 앞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하는데 중요한 변수 중 하나는 경기 흐름이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전분기 대비)은 지난해 4분기 -0.3% 역성장한 뒤 올해 1분기 0.3%, 2분기 0.6%로 조금씩 개선되고 있으나, 앞으로도 이같은 흐름이 이어질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최근 성장률 회복은 수출과 수입이 모두 줄어든 가운데 수입 감소폭이 더 크면서 발생한 ‘불황형 성장’의 성격이 짙은데, 아직 이같은 모습이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성장률이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려면 수출과 소비가 되살아나야 하는데, 최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위험과 국제유가 상승, 가계부채 증가로 불확실성이 더 커졌다.
특히 최근 국제유가 상승은 물가상승과 경기침체를 동시에 유발하는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석 교수는 “이·팔 전쟁으로 석유류 가격이 상승하면 기업들의 생산비용이 올라서 그게 일부 가격으로 전가되는데 물가상승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기업의 경우 생산비용이 상승하니 이윤 감소를 줄이기 위해 일부 생산을 줄인다”면서 “유가가 상승하면 에너지를 전량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수입액이 증가하니 순수출이 줄어들고 무역수지가 낮아져 결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 경제의 핵심인 수출은 올해 8월까지 석유제품, 반도체 등을 중심으로 12개월 연속 전년 동월 대비 감소하고 있다. 한은은 올해 하반기부터는 수출 반등세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그동안 중국 대신 우리 수출에 큰 도움을 줬던 미국 경제가 내년부터 주춤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국제유가 상승으로 수입물가도 오름세를 보일 수 있는 만큼 반등폭이 크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고금리에 소비 부진…반도체 반등도 불확실
특히 전문가들 사이에선 하반기 이후 소비 부진이 이어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민간소비는 지난해 3분기 1.6% 증가한 이후 4분기 -0.5%, 올해 1분기 0.6%, 2분기 -0.1%로 계속 지지부진한 모습이다. 이에 따라 소비, 투자 등을 고려한 내수 성장 기여도는 -0.8%로 성장을 끌어내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계부채가 많고 다중채무자도 400만명이 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고금리 상황에선 가계가 소비를 늘리기 힘들다.
우리나라 수출 주력 상품인 반도체 시장 상황도 불확실성이 남아있다. 지난달 반도체 수출액은 99억9000만달러로 올해 최고 수준까지 회복됐고, 반도체 선행지표인 현물 가격도 저점을 찍고 조금씩 오르고 있지만 최근 미국이 저사양 인공지능(AI) 칩에 대해서도 중국으로의 수출을 금지하면서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리스크가 확대됐다. 당장 이번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 강화가 우리 산업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으나 앞으로 시장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중국 경제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수출에 긍정적인 요인이다. 전날 중국 국가통계국은 3분기 경제 성장률이 전년 대비 4.9%로 집계됐다고 밝혔는데, 이는 시장 전망(4.4%)을 크게 뛰어넘는 수준이다. 같은 날 나온 산업생산(4.5%), 소매판매(5.5%), 실업률(5.0%) 등 다른 경제지표도 개선세를 보였다. 중국 경제가 회복되면 우리 대중 수출이 늘면서 성장세가 빨라질 수 있고, 이는 한은이 통화정책 부담을 줄여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한 국제유가 흐름도 한은 통화정책의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병원 폭발로 수백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중동 전쟁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국제유가도 이날 2% 안팎으로 급등했다. 국제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의 경우 배럴당 91.5달러에 장을 마쳤고, 일각에선 100달러 돌파 전망도 꾸준히 나온다. 유가가 올라 물가 부담이 커지면 한은은 금리인하 시점을 늦출 수밖에 없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과도하게 높은 가계부채 비율 역시 한은의 기준금리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기준금리가 연 3.5%까지 오른 상황에서도 가계대출이 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한은이 ‘피벗(정책 전환)’을 공식화할 경우 다시 집값 상승 기대감이 커지면서 가계부채가 폭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중장기적으로 소비와 성장률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은 입장에서는 누적된 민간부채가 많아 금리인상을 주저하는 상황”이라며 “금융감독원 등이 은행 대출 확대를 제어하고 있어 정부 차원에서 금융 규제가 이어진다면 금리를 올릴 명분이 줄어들 수 있다”고 진단했다. 하 교수는 “수출이 조금씩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소비가 늘지 않고 정부 역시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하고 있지 않다”며 “기준금리를 동결하는 현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창용 총재 “금통위원 1명, 향후 3개월 금리 낮출 수도”
이날 이창용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회의 후 기자간담회에서 “지난 8월 예측한 물가상승률 하락 경로보다는 속도가 늦어지지 않겠냐는 게 금융통화위원들의 중론”이라고 밝혔다. 그는 “내년 12월 말 물가상승률 2%는 불확실성이 크다”면서도 “그 수준으로 수렴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속도가 지난 8월 예측보다 늦어질 수 있다”고 부연했다.
특히 이 총재는 이날 회의에서 금융통화위원들이 전원 일치 의견으로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했지만, 향후 3개월 기준금리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 부분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저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추가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고 했다”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졌고 목표 수렴 시기가 늦춰질 가능성이 커져서 지난 8월 회의 때보다 긴축강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금통위원 5명 중 1명은 가계부채가 더 악화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나머지 1명은 정책 여건의 불확실성이 워낙 커서 향후 3개월을 봤을 때 기준금리를 올릴 수도, 낮출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고 밝혔다.
가계부채 증가 우려에 관해 이 총재는 “미시적인 조정을 해보고 안 되면 금리를 통한 거시적인 조정도 생각해보겠지만 그런 단계는 아니다”고 일축하면서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결국 부동산 문제로, 통화정책은 부동산 가격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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