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과 중국을 미국이 거부하고 있다는 내용의 만평. / 사진 = 대만 매체 진주어칸 |
“중국이 확실히 투자 비용이 저렴합니다. 인력 구하기도 쉽고, 한국이나 미국에 비해 좋은 투자처인 것은 맞습니다.”
20일 인천에서 만난 대만 반도체 기업 관계자가 중국향(向) 투자에 대해 한 말이다. 이 기업은 중국 상하이와 션젼에 판매 거점·팹(생산시설)을 보유하고 있다. 비용이 비싼 일본이나 상대적으로 파운드리(위탁 생산) 역량이 떨어지는 미국 대신 인건비가 저렴하고 정부 보조금을 주는 중국을 택했다. 이 관계자는 “대만 기업 입장에서는 인력난과 규제가 빡빡한 한국에 쉽게 투자하기 어렵다”고 했다.
미국이 최근 중국 반도체를 제지하기 위해 레거시(구형) 칩까지 제재 범위를 확대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대만 기업이 중국 투자를 늘리는 것은 제재를 무력화하는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7나노급 칩 개발로 미국을 놀라게 한 화웨이에 대만의 ‘물밑 도움’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대만 정부가 진화에 나섰지만, 중국 투자가 꾸준히 늘고 있어 미국과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일고 있다.
“왜 중국 도와줘” 마뜩잖은 미국, “손해보는 것은 우리” 불만 품은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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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조수아 디자인기자 |
이달 들어 대만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미국 정부의 중국 내 장비 반입 완화조치다. 미국은 삼성·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에 무기한 유예조치를 내렸으나, 대만 기업에는 1년 유예 조치를 부과했다. TSMC도 다급히 무기한 유예를 요청했으나, 허용 여부는 미지수다. 대만 매체 ‘풍추완메이’는 “미국이 한국 기업과 대만 기업에 부과한 조치는 차별”이라며 “TSMC의 대우는 삼성만큼 좋지 않다”고 보도했다.
대만 반도체업계는 미국 정부의 차등 유예조치가 중국과의 협력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최근 블룸버그통신은 ‘탑코 사이언티픽’ ‘엘엔케이 엔지니어링’ 등 대만 기업이 화웨이 반도체 공장 건설을 돕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업체는 화웨이 협력사에 직접 공정을 건설하기도 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화웨이는 중국 전역에서 비밀 반도체 제조시설을 건축 중으로, 대만 업체가 이를 돕는 셈이다.
대만 내에서도 ‘국가 안보를 해친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대만 정부가 나섰다. 대만 경제부가 직접 4개 기업을 지목해 조사 중이다. 화웨이와 협력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총위에 테크놀로지’는 “화웨이에 어떠한 반도체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으나,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장은 “중국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을 경우 최대 2500만 대만달러(한화 약 10억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대만과 미국 간의 불협화음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자국 반도체 생산량을 늘리려는 미국의 요구에 불만을 갖고 있던 대만 반도체는 중국을 대체 투자처로 지목했고, 중국이 대만 기업을 활용해 기술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대만 업계 관계자는 “언어 문제나 지리적 조건, 비용 등 중국은 최적의 반도체 거점”이라며 “국가 간 갈등을 제외하면 (투자를)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TSMC의 미국 2나노 공장 가동 지연에도 대만 반도체의 불만이 담겨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케이티 존스 애리조나 주지사는 최근 대만을 방문해 TSMC가 미국에 웨이퍼 공장 외에도 패키징(후공정) 공장을 지어줄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미국 인력의 파운드리 숙련도 문제가 더해지면서 TSMC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딜런 파텔 세미애널리시스 애널리스트는 “TSMC에게 미국 거점은 쓸모없는 장식품과 같다”고 말했다.
TSMC 외에도 UMC, 미디어텍 등 대만 3대 반도체업체가 모두 중국 투자 확대를 고려중이어서 당분간 미국의 불편한 시선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UMC는 지난 7월 중국 본토와 협력해 ‘샤먼리엔신’이라는 합작 법인을 세우는 등 적극적이다. 웨이저자 TSMC 최고경영자(CEO)도 19일 실적발표회에서 “2024년까지 중국 내 생산 계획을 정상화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우리도 중국 의존도 줄이고, 미일 협력 강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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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MC 미국 지사 모습. / 사진 = TSMC 제공 |
미국과 대만 반도체업계의 갈등은 국내 업계에 타산지석이다. 저렴한 비용과 시장 규모를 고려해 중국 투자를 늘렸다가 미국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국내 기업의 중국 생산 비중을 낮춰야 한다는 지적도 힘을 얻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공장에서 낸드플래시 전체 생산량의 40%를 만들고 있으며, SK하이닉스는 중국 댜렌과 우시 공장에서 각각 낸드 20%, D램 40%를 제조하고 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새 국가와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대표적인 사례는 일본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신산업 분야 한·일 협력 증진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차세대 반도체 분야에서 일본과 협력할 경우 원천기술 개발과 연구개발(R&D), 생산 시설 유치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일본과 협력을 확대하면 일정 부분 ‘차이나 리스크’ 완화가 기대된다.
송치웅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기업들이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 동참하면 중국 시장에서 손실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라며 “미국 공공 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도록 노력하고, 연구개발센터 유치·양국 간 기술 교류 등을 확대해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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