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테크 마이크로소프트(MS)가 게임 회사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인수가 687억달러(약 92조원), 무려 21개월 걸린 세기의 메가 딜이었습니다.
영국 경쟁 당국인 CMA가 두 기업의 합병을 승인함에 따라 MS는 곧 액티비전블리자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석연찮은 점은 남습니다. 과연 게임 회사 한 곳에 90조원을 지출한 건 현명한 투자일까요? MS는 게임 시장에서 어떤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인수, 또 인수…몸집 불리는 MS 게임 사업부
MS의 ‘게이밍 사업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짚고 넘어가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MS의 콘솔 게이밍 사업부인 ‘엑스박스’의 총괄을 맡은 필 스펜서 최고경영자(CEO)입니다. 이번 MS와 액티비전블리자드의 인수 건에서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엑스박스 CEO 자리에 오른 뒤 스펜서의 행보는 단 한 개로 일축됩니다. 끝없는 인수합병입니다. 이미 엑스박스는 미국 대형 게임 스튜디오인 ‘베데스다’를 비롯해 크고 작은 게임 기업들을 합병해 왔고, 이번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로 방점을 찍었지요.
일견 엑스박스의 인수 전략이 노리는 건 ‘외형 확장’입니다. 현재 엑스박스는 클라우드 게이밍 서비스인 ‘게임패스’를 밀어주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월 구독료를 내고 엑스박스가 제공하는 게임을 마음대로 골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게임 산업의 넷플릭스와 같죠.
액티비전블리자드는 수많은 인기 온라인 게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미 누적 수억명의 유저들을 관리 중입니다. 액티비전블리자드를 게임패스에 흡수하는 것만으로도 엑스박스는 월 구독료 수입을 크게 늘릴 수 있습니다.
게임에 90조원 쓴 MS 속내…’AAA 게임’ IP 겨울 끝내라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스펜서가 게임사 인수를 통해 노리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따로 있습니다. MS가 주로 인수한 게임사들은 일명 ‘AAA 게임’을 개발하는 대형 스튜디오들입니다. AAA 게임은 대형 팀이 막대한 예산을 지출해 개발한 거대 게임을 이르는 말로, 통상 200여명의 개발자가 약 2억달러( 이상을 들여 8~10년간 개발합니다.
AAA 게임은 개발에 드는 비용과 시간이 큰 만큼 시장의 파급력도 막대합니다. 문제는, 2010년대 이후로 AAA 게임사들의 ‘군비 경쟁’이 과열되면서 게임 개발 비용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으로 폭증했다는 겁니다.
최근 유출된 스펜서의 사내 서신에서도 이 문제가 지목됐습니다. 스펜서는 AAA 게임 경쟁 과열의 원인을 ‘유통 시장 변화’로 꼽았습니다. 과거엔 거대 게임사가 게임 패키지 판매업체의 매대를 장악해 마케팅했으나, 현재는 온라인 다운로드가 보편화되면서 이런 전략이 무의미해졌다는 겁니다. 대신 거대 게임사는 중·소형 게임사는 따라올 수 없는 AAA 게임에 치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AAA 게임들의 개발 비용이 가볍게 수천억원을 능가하게 되자, 이제 대형 게임사들은 게임 개발을 ‘리스크’로 여기게 됩니다. 게임 개발은 불확정성이 큽니다. 비공개 테스트 중 부정적인 평가라도 받게 되면 프로젝트가 뒤엎어질 수도 있지요.
예전 같았으면 대형 게임사들이 미흡한 게임 한두 개를 취소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AAA 게임 하나만 잘못 만들어도 기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형 게임사들 사이에서는 ‘IP 겨울’이 들이닥쳤습니다. 게임 회사들이 신작을 내놓는 주기가 뜸해지고, 기존에 내놓은 게임의 수명을 연장하는 방식에 의존하기 시작한 겁니다. 실제 액티비전블리자드의 신작인 ‘디아블로 4’, ‘콜 오브 듀티 : 모던 워페어 3’ 등에서 이 문제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제각각 수십년 된 유명 게임의 후속작이거나, 리메이크 버전에 불과합니다.
게임에 백지 수표 쓴 MS, 해자 쥘 수 있을까
스펜서는 AAA 게임사의 정체기를 게임 패스가 끝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게임 패스는 넷플릭스처럼 월 구독료로 고정 수입을 만듭니다. 일단 예측 가능한 고정 수입이 계속 들어오면, 대형 게임사 개발자들은 ‘안정성’을 얻게 됩니다.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 기획과 개발에 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스펜서는 ‘넷플릭스 전략’이 이미 블럭버스터 영화업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합니다. 서신에서 그는 “넷플릭스는 어떤 영화 스튜디오보다 훨씬 더 많은 신규 IP를 창출하면서 할리우드에서 동일한 역동성을 분명히 입증했다”라고 밝혔습니다.
만일 스펜서의 예견대로 ‘게임패스’라는 거대한 수익 창출 수단 덕분에 게임 기업들이 안정화할 수 있다면 10년 넘게 지속된 ‘AAA 게임 가뭄’도 막을 내릴 겁니다. 또 AAA 게임 개발사 다수를 장악한 엑스박스는 다른 게임 기업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해자(Moat)를 보유하게 되는 셈입니다.
MS에 따르면 게임 패스는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 전인 지난 2분기에 이미 1억5000만명의 월간 활성 유저수를 기록했으며, 분기 매출도 10억달러에 근접했다고 합니다.
글로벌 시장정보 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드 게이밍 시장은 올해 40억달러 규모를 넘어섰으며, 매년 4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MS가 이 시장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확보한다면 윈도 운영체제(OS), 애저 클라우드를 잇는 또 다른 성장 동력을 보유하게 되는 셈입니다. MS가 스펜서 CEO에 사실상의 ‘백지 수표’를 쥐여준 이유입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