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항저우아시안게임 중계방송을 보면서 얻은 망외(望外)의 소득이 있다면 중앙아시아 5국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예컨대, 조정경기를 보면서 우리는 카누와 카약에서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 아시아의 강호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축구대표팀이 16강에서 맞붙은 팀이 키르기스스탄이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언론에 많이 등장해 익숙한 나라지만 키르기스스탄은 상대적으로 낯설었다. 축구 16강전이 열렸을 때 검색어 1위가 키르기스스탄이었다는 사실이 모든 상황을 웅변한다.
항저우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직전, 뉴욕에서 ‘C5+1’ 정상회의가 열렸다. C5는 중앙아시아 5국으로 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을 뜻한다. 미국 대통령이 중앙아시아 5국 대통령과 정상회의를 가진 것은 역사상 최초다.
스탄(Stan)은 페르시아말로 나라, 땅이라는 뜻. 그래서 언론에서는 중앙아시아 5국을 가리켜 ‘스탄 5형제(the five Stans)’라고 칭한다. ‘스탄 5형제’는 크게 네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1991년 말 소련이 붕괴될 때 떨어져나와 독립한 나라들이다. 곳곳에 45년 소련 지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권위주의 체제가 유지된다. 가장 두드러진 게 이름이다. 남성의 성(姓)이 ‘~프’로 끝나고, 여성의 성이 ‘~야’ ‘~바’하는 식이다.
두 번째는 인종적 관점이다. ‘스탄 5형제’는 비유럽계 유목·기마 민족의 후예가 주류를 형성한다. 우리가 국사 시간에 배운 돌궐(突厥)족이 바로 비유럽계 유목·기마민족에 포함된다. 세 번째는 ‘스탄 5형제’는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다. 마지막으로는 ‘스탄 5형제’가 희토류를 비롯한 지하자원 부국이라는 사실이다.
‘스탄 5형제’를 오래전부터 눈독 들여온 나라가 중국이다. 9월의 뉴욕 ‘C5+1’ 회의에 앞서 지난 5월 시진핑은 ‘스탄 5형제’를 산시성 시안(西安)으로 초청해 ‘중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미국과 중국은 ‘스탄 5형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경쟁한다. ‘스탄 5형제’는 어느 편에 설까. 일단 지리적으로 중국이 유리해 보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 ‘스탄 5형제’는 중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시진핑은 ‘스탄 5형제’를 왜 베이징이 아닌 시안으로 초대했을까. 중국이 ‘스탄 5형제’와 역사적으로 깊이 엮여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시안은 중국 13개 왕조의 수도였고, 당나라 때는 장안(長安)으로 불렸다. 시안은 서역(西域)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로이면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었다. 실제로 시안에는 실크로드의 기점을 기념하는 거대한 대상(隊商) 조형물이 있다.
낙타와 말에 물품을 잔뜩 싣고 서역을 향해 길을 떠나는 카라반. 이 대상의 맨 앞에서 길잡이를 하는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인물의 이목구비가 뒤쪽의 중국인과 크게 다르다. 소그드(Sogd)인이다. 기원전 중앙아시아지역에 소그드 문명을 건설할 정도로 번성했던 페르시아계 유목민. 소그드인은 실크로드 대상 무역의 중개자였다. 이들 없이는 카라반이 실크로드를 오가는 게 불가능했다.
‘스탄 5형제’는 실크로드의 도정(道程)에 있는 나라들이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사이에는 거대한 사막이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들어가면 살아나오지 못한다는 이 사막을 피해 비단길은 위, 아래 두 갈래로 나뉜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스탄 5형제’를 거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서양에 전해 준 세 가지가 종이, 화약, 나침반이다. 동양의 종이가 서양에 전파되는 기나긴 여정을 추적한 사람이 대만계 일본 역사학자 진순신. 그의 명저 ‘페이퍼 로드(Paper road)’를 읽으면 눈이 밝아진다. 종이는 문명의 시작이며 끝이다.
서기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환관 채륜(蔡倫)이 종이를 개발했다. 종이가 나오기 전까지 인류는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 죽간 등을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사용했다. 파피루스는 쉽게 부서졌고, 양피지는 무겁고 비쌌고, 죽간은 무겁고 부피가 컸다. 인류 역사는 보다 빠르고 편리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갖기 위한 역사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국의 종이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서양에 전해진 사건이 751년 탈라스(Talas) 전투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북방 국경에 인접한 도시가 탈라스다. 탈라스강이 흐르는 계곡에서 이슬람군과 당나라 군대가 맞붙었다.
중앙아시아를 중앙에 놓고 8세기 중엽의 세계사를 조망해보자. 중국 대륙에는 당(唐 618~907)이 통일 제국으로 세계 최고 문명을 구가하며 주변국에 강력한 구심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실크로드는 당의 영토 밖에 있었지만 세계 최강 제국의 자기장이 미쳤다.
동쪽으로는 신라 경주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소그드인은 신라까지 들어와 서역 문물을 유통시켰다. 그 대표적인 증거가 신라 38대 원성왕릉을 호위하는 무인석의 얼굴이다.
비슷한 시기 서역에서는 이슬람교가 거칠게 포효하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창건한 마호메트가 박해를 피해 아라비아반도 메디나로 옮겨가 그곳을 포교 거점으로 삼았다. 이후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사막을 중심으로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해나간다. 정교(政敎) 일치를 표방하는 이슬람교는 장악한 지역은 교주(칼리프)가 다스렸다.
이슬람교는 동쪽으로 세력을 뻗쳐나가 페르시아(이란)의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다. 페르시아를 장악한 이슬람교는 사막 종교의 한계에서 벗어나 세계 종교의 틀을 갖추며 제국을 세운다. 이후 이슬람교는 페르시아를 거점으로 전방위로 세력을 확산한다. 아바스 왕조에 이르러 이슬람 제국은 본격적으로 실크로드의 중심지인 중앙아시아를 탐했다. 중앙아시아에는 조르아스터교, 불교, 기독교 일파 등이 뒤섞여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할 수만 있다면….
결론부터 말하면, 5일간 벌어진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은 대패했다. 세계 최강 당나라 군대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다. 하나는 751년 당 내부의 복잡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원정(遠征)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당군과 연합군을 구성한 유목민 부족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슬람군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당군의 사령관은 고구려 출신 고선지였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중국이 이 패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의 영토 밖에서 벌어진 전투였기에 빼앗긴 땅이 없어서였다. 탈라스 전투는 문명의 충돌이었다. 새뮤얼 헌팅턴이 예견한 ‘문명충돌론’이 1200년 전 중앙아시아 탈라스에서 벌어졌다.
당에서는 이슬람은 대식(大食)이라고 표기했다. 대식국에 포로로 잡힌 당군 병사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고, 얼마 뒤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서 종이가 생산되었다. 이어 실크로드를 따라 종이와 종이 제조술이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를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기독교 문명이 최첨단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종이를 갖게 되면서 마침내 세계사의 무게 중심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옮겨간다.
당 제국이 멸망한 게 907년. 이후 중국 대륙에는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청(淸) 왕조가 명멸했다. 이들 왕조는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없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에 함락되고 실크로드가 막히면서 중앙아시아는 중국의 관심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그러는 사이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전역을 장악했고, 유라시아 대륙의 이슬람화가 완성되었다.
중앙아시아와 맞붙어 있는 곳이 신장위구르 자치주. 튀르크계 유목인 위구르족이 주류를 차지한다. 신장위구르 자치주는 인종·역사·종교적으로 ‘스탄 5형제’와 동질감을 느낀다. 위구르는 한자로 회흘(回紇). 회흘족이 믿는 종교라고 해서 이슬람교를 회교(回敎)라고 부른다.
‘스탄 5형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소련 공산 체제를 뼛속 깊이 경험한 ‘스탄 5형제들’은 지난 30여년간 자유를 맛보았다. 그들은 지금 중국이 신장위구르 자치주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
조성관 작가·천재 연구가
‘지니어스 테이블’ 운영자, 전 주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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