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이래 삼성이 가장 중시한 가치가 인재와 기술입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재를 모셔오고 양성해야 합니다. 최고의 기술은 훌륭한 인재들이 만들어 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10월 25일 사장단 간담회에서 밝힌 회장 취임 각오다. ‘사람’과 ‘기술’은 그동안 삼성이 꾸준히 투자해 온 분야다. 이 회장 취임 후에는 명확한 경영철학으로 굳어졌다. 이 회장이 직접 두 영역에 ‘목숨 걸었다’라고까지 표현하며 절박함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회장 취임 1년이 지난 현재 삼성은 인재와 기술 확보에 어느 때보다 분주하다.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실적은 바닥을 쳤고, 경쟁사는 턱밑까지 쫓아왔다. 대형 인수합병(M&A), 신사업 추진, 대대적인 조직개편 등 시장 불안을 잠재울 총수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이들도 많다. 이에 이 회장은 인재·기술 경영을 거듭 강조하면서 ‘뉴(New) 삼성’ 비전 달성 기반을 다질 계획이다.
이 회장은 이병철 창업 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부터 이어진 ‘인재제일’ 경영철학을 계승, 우수 인재 확보에 공을 들였다. 경영철학 한 축인 ‘기술경영’ 역시 좋은 인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이 회장은 취임 후 우수 인재 확보에 전사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다.
삼성은 2018년 3년간 4만명 채용 계획을 선언한 데 이어 지난해 5월에는 5년간 8만명을 신규 채용하겠다는 공격적인 목표까지 제시했다. 이 회장의 인재 확보 지침은 미래를 준비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체력을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실제 삼성전자 국내 임직원 수는 2018년 10만3011명에서 2021년 11만명(11만3485명)을 돌파한 데 이어 올해 6월 기준으로는 12만4070명까지 늘며 매년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올해 역시 사상 첫 임직원 ’13만명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 국내 5대 그룹 중 유일하게 유지하는 삼성의 공채 제도는 정기적인 우수 인재 확보와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파격적인 인사 제도와 외부 인재 유치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 회장 취임 후 첫 조직개편이었던 지난해 12월 삼성전자는 30~40대 17명을 임원으로 전격 승진 발령했다. 신규 임원 평균 연령 역시 46.9세로 전년 47세보다 낮아졌다. 연초부터 최근까지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애플, 인텔, 에릭슨 등 글로벌 기업 핵심 기술인재를 전방위로 영입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지난해 6월 유럽 출장 후 귀국길에서 ‘첫 번째도 기술, 두 번째도 기술, 세 번째도 기술’이라고 짧지만 비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0박 11일의 긴 여정 동안 네덜란드 ASML, 독일 BMW 등 최고경영진을 만난 뒤 마주한 위기감이 반영됐다. 삼성이 주력하는 반도체 시장의 빠른 기술 변화와 전장 등 새롭게 부상한 영역에서의 삼성의 전략,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불안 등 복합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술 확보뿐이라는 절박함이 묻어있다는 해석이다.
이 회장의 ‘기술’ 메시지는 여러 차례 이어졌다. 지난해 복권 후 첫 메시지 역시 “기술 중시, 선행 투자의 전통을 이어 세상에 없는 기술로 미래를 만들자”고 강조한 데 이어 회장 취임 후 첫 사장단 회의에서도 “창업이래 가장 중시한 가치 중 하나가 기술”이라고 언급했다.
이 회장이 기술을 강조하는 것은 삼성이 주력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가전 등 전 영역이 기술 변곡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시장에서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는 글로벌 1위인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성장 잠재력이 큰 반도체 설계(팹리스)와 위탁생산(파운드리)으로 향하고 있다. 앞서 AMD, 인텔, TSMC 등이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이들과 치열한 기술 경쟁을 펼쳐야 한다.
스마트폰 시장에선 애플의 강세와 수요 부진 속에 수익성 회복이 관건이다. 삼성전자는 폴더블폰을 내세워 시장 판도변화를 유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선 후발주자와 기술 초격차가 절실하다. 액정표시장치(LCD) 중심인 TV 사업 역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등 프리미엄 디스플레이 지배력 확보가 관건으로 떠오른다.
이 회장 역시 기술 변곡점에서 새로운 초격차를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삼성은 지난해 5월 5년간 450조원을 전격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투자 영역은 팹리스, 파운드리, 바이오, 첨단 디스플레이 등으로 기술 변곡점에 있는 분야다.
대대적 연구개발(R&D)·설비 투자 외에도 특허를 통한 기술 확보도 집중하고 있다. 유엔(UN) 산하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지난해 삼성전자의 특허협력조약(PCT)에 따른 국제 특허 출원 건수는 4387건으로 집계됐다. 전년(3041건) 대비 44% 증가하며 화웨이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재계 관계자는 “사람과 기술 중요성은 어느 기업이든 강조하는 요소지만 현재 삼성의 상황에서는 더욱 절박하고 현실적인 고민”이라며 “이재용 회장 역시 취임 후 가장 우선해야 할 과제로 초격차를 위한 기초체력을 기르기 위해 사람과 기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취임 후 지난 1년이 인재와 기술에 초점을 맞춘 투자에 집중했던 시기였다면 2년 차에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인재·기술은 단기간 투자로 성과가 나오는 영역이 아니지만 현재 삼성전자의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어 돌파구가 필요하다. 그동안 꾸준히 제기된 ‘JY 리더십’ 브랜드 정립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도 구체적인 성과 도출이 필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2분기 이후 올해 3분기까지 5개 분기 연속으로 전년 동기 대비 영업이익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주력 부문인 반도체 사업은 올해 들어 3개 분기 모두 적자에 빠졌다.
전반적인 업황 악화가 원인이지만 총수로서 주력 사업의 부진 장기화는 분명 부담 요인이다. 그나마 올해 3분기 영업이익 1조원대를 회복했지만 완전한 부진 탈출 신호로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4분기 스마트폰 시장이 비수기인 데다 반도체 시장은 내년에야 반등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실적 부진과 회장 취임 2년 차를 맞아 적극적인 리더십 표출을 위해 연말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인사 가능성이 제기된다. 삼성전자는 사업부문별 최고경영자(CEO)를 두는 책임 경영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 회장이 경영에 있어 새로운 메시지를 제시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수단은 조직개편과 인사다.
지난해 회장 취임 후 첫 인사에선 한종희 디바이스경험(DX) 부문장(부회장)과 경계현 반도체(DS) 부문장(사장) 투톱 체제를 유지하는 등 큰 틀에서 변화는 없었다. 다만 이 체제가 내년에는 3년 차에 접어드는 만큼 올 연말 2024년도 정기인사에서 변화를 줄 가능성도 있다.
사업부문 수장이 바뀌면 사장, 부사장급 고위 임원 인사가 연쇄적으로 이뤄진다. 큰 폭의 세대교체까지도 거론된다. 실적 악화에 따른 책임을 묻는 동시에 이 회장이 1년간 구상한 ‘뉴 삼성’ 경영전략을 본격 실행할 인재를 전격적으로 발탁하는 차원이다.
과감한 대폭 인사로 조직을 쇄신할지, 인사 범위를 최소화하며 안정적인 변화를 꾀할지 어느 쪽이든 이 회장의 리더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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