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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일치인데 만장일치 아니라는 총재
“지난 몇 번의 회의는 모든 것이 만장일치였는데 (이번엔) 만장일치가 안 나와서 논의 과정이 길어졌습니다.”
지난 1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연 3.50%로 만장일치로 동결한 직후 이창용 총재는 간담회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만장일치로 금리를 동결했으나 이번엔 만장일치가 아니라고 한 건 이 총재가 지난해 11월부터 도입한 ‘K점도표’ 또는 ‘이창용식 포워드 가이던스(선제적 정책방향제시)’를 염두에 둔 것이다. 금통위 결정과는 별개로 이 총재는 향후 3개월 시계라는 전제로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금통위원 6명의 금리 전망을 밝혀왔다. ‘모든 것’이라고 표현한 것도 금통위 의결과 K점도표를 합쳤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3.00%에서 3.25%로 올렸던 지난해 11월부터 기자간담회에서 K점도표를 공개했다. 총재가 금통위 논의 과정에서 나온 금통위원들의 발언을 종합해 향후 정책 방향을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금통위원 1명은 기준금리를 3.25%로 동결하자고 했고, 3명은 3.50%로 한 차례 추가 인상, 2명은 3.75%까지 두 차례 추가 인상을 주장했다. 올해 1월엔 기준금리를 3.50%로 올린 이후 동결과 추가 인상이 3대 3으로 나뉘었다.
이후 한은 금통위는 올해 2월부터 기준금리를 연 3.50%로 6연속 동결했다. 2월에만 조윤제 금통위원이 연 3.75%로 인상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으나 4월, 5월, 7월, 8월, 10월은 모두 만장일치로 동결 결정됐다. 다만 2월과 4월엔 5명이 3.75%로 인상, 1명이 3.50% 동결을 제시했다. 5월, 7월, 8월엔 금통위원 6명 모두 만장일치로 3.75% 가능성을 열었다. 5월부터 8월까지 금통위원 전원이 금리를 동결하면서 3.75% 인상 가능성을 열어두자는 이른바 ‘매파적 동결’ 흐름이 연속으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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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예상과 달리 세 갈래로 나뉜 향후 금리 전망
이번에도 시장에선 금통위원들이 전과 마찬가지로 금리 동결과 3.75% 인상 가능성을 만장일치로 결정할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만장일치 금리 동결은 맞췄으나 향후 정책 방향은 예측이 빗나갔다. 이 총재 발언을 종합하면 ①금리를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1명) ②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4명) ③가계부채에 선제 대응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1명) 등으로 금통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②번과 ③번이 사실상 같은 의견이지만 ③번의 의견이 더 세다는 측면에서 다르게 볼 수 있다. 시장에서도 인하 가능성을 열어둔 금통위원과 금리 인상을 강력히 언급한 금통위원 등장에 주목했다.
이번 회의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는 총재 발언을 비춰보면 이는 사실상 소수의견이다. 그러나 소수의견은 개별 금통위원이 금통위 결정에 대해 이름을 밝히고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절차다. 이번엔 향후 금통위 의사록이 공개되더라도 어떤 금통위원이 어떤 의견을 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의사록은 익명으로 작성되기 때문이다. 결국 금통위원들이 총재의 K점도표를 활용해 향후 정책 방향과 관련한 ‘약식 소수의견’을 낸 셈이다.
이 총재의 K점도표 자체가 시장과의 소통을 위해 금통위 의결 과정에서 나온 의견을 취합해 전달하는 방식인 만큼 약식 소수의견 자체가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만장일치로 금리를 한 차례 더 올리자고 했던 금통위원들이 왜 갈라졌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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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부담인데 경고하려 발언 수위 높였나
먼저 선제적 금리 인상 의견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그간 반복되는 커뮤니케이션에 시장이 적응했기 때문이다. 금통위원 전원이 금리를 한 번 더 올릴 수 있다고 하면서도 다섯 차례나 만장일치로 금리를 동결하는 내용이 반복되면서 시장에선 현재 금리가 고점이라는 인식이 굳어졌다. 말뿐인 인상 가능성에 시장이 반응하지 않자 발언 강도를 높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정식 소수의견에 대한 부담을 들 수 있다. 통상적으로 소수의견은 통화정책 변화 신호로 해석된다. 2021년 7월 고승범 당시 금통위원이 인상 소수의견을 처음 낸 이후 8월 실제 인상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물가나 가계부채 등 어떤 이유로든 인상 소수의견을 한 번 내면 해당 조건이 해소되거나 실제로 금리가 인상될 때까지 같은 의견을 꾸준히 내야 한다. 금리 인상 가능성이 크지 않은 상황이라면 소수의견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도 크지 않다.
해당 의견이 가계부채에 대한 선제 대응을 강조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총재가 간담회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 한은 금통위는 가계부채 문제를 금리 등 통화정책보단 대출 규제 등 거시건전성 정책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시적 조정으로도 안 되면 금리 등 거시적 조정을 하겠으나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지난달 당국의 대책이 나온 만큼 시차를 감안해 연말까진 관망세일 가능성이 크다.
약식 소수의견이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실제 금리를 움직일 가능성이 낮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다음 달 회의에서 금리를 인상한다면 약식이 아닌 정식으로 소수의견을 내면서 정책 변화를 예고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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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릴 가능성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중동 사태 주목해야
금리 인상과 인하 가능성을 모두 열어둬야 한다는 약식 소수의견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금리 인하를 언급한 구체적인 이유는 의사록을 봐야 알 수 있지만 현시점에선 금리를 인상하는 것보다 인하할 가능성이 더 낮기 때문이다. 나머지 금통위원은 금리 인하를 언급하는 자체가 이르다고 보고 있다. 이 총재도 “내리자고 말한 것이 아니라 성장 하방 위험 등을 고려할 때 올리는 옵션과 마찬가지로 내리는 옵션도 열어놔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총재뿐만 아니라 금통위가 통화정책방향 결정문에서 여러 번 강조한 ‘이스라엘·하마스 사태’ 전개 양상은 주요 변수로 봐야 한다. 이 총재는 “금통위원 중 한 명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다른 다섯 명은 인상을 열어둬야 한다고 했을 때 전제조건에 더 관심을 둬야 한다”며 “이번 중동 사태 등으로 한은이 예상하는 경로보다 물가가 올라간다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약식 소수의견처럼 가계부채로 인해 금리를 올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히려 중동 사태 확산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하면서 물가·환율이 예상보다 크게 오른다면 금리 인상 가능성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커질 수 있다. 당분간 가계부채보단 중동 사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 더 추가로 내년 중 인하 소수의견이 정식으로 나온다면 통화정책 변화가 임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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