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29일 오후 10시15분, 가파르고 좁은 이태원 골목에 몰린 핼러윈 인파가 넘어지고 깔리며 159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태원 참사’로 명명된 이 사건에 온 국민이 충격에 휩싸였다. 책임 소재를 묻기 위한 수사가 이어졌고, ‘후진국형 인재’라며 제도 개선과 정부의 대응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1년이 다 돼가는 현재 각종 행사나 축제를 개최할 때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은 ‘인파 관리’를 무엇보다 앞세우고 있다. 국회에서는 안전관리계획 수립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 개정이 진행되고 있고, 참사 당시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된 불법 건축물에 대한 지자체의 단속 및 안전 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지상과제’된 인파 관리= 정부와 지자체 등에서 작성한 공문서를 열람할 수 있는 ‘정보공개포털’에서 지난해 10월29일부터 23일까지 제목에 ‘인파’가 들어간 공문서는 총 90개가 검색됐다. 이태원 참사 전인 2021년 10월1일~2022년 10월28일에는 단 한 개도 검색되지 않는 것과 비교된다. 정보공개포털에 공공기관의 모든 문서가 등록되는 것은 아니어서 실제 인파 관리 대책 마련을 위해 만들어진 공문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서 대부분은 지역 축제나 행사에서의 인파 밀집 관리를 위한 대책을 담고 있다. 이 가운데 12개는 지자체의 ‘인파사고예방단’ 구성 및 운영 계획이었다. 인파사고예방단은 인파 밀집이 예상되는 지역 주요 축제 장소 등을 사전 점검해 위험 요인을 사전 제거하고 현장 질서 유지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 서울 강서구청이 지난 10일 공개한 문서를 보면, 10~11월 관내에서 9건의 지역 행사가 개최되고 부구청장을 단장으로 행사 개최 이틀 전부터 현장 여건 분석 등 사전 안전 확보에 나선다는 계획이 담겼다. CCTV를 활용한 지능형 인파관리 시스템 구축 계획과 관련된 문건도 6개 있었다.
정부는 올해 1월 재난관리 개선안을 담은 ‘범정부 국가안전시스템 개편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정부는 인파 사고를 화재·붕괴 등과 같은 ‘사회재난’에 포함하고, 인파 밀집이 예상되는 축제·행사는 주최자의 유무와 상관없이 지자체가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IT 기술을 활용한 인파관리 시스템 구축 등도 이때 발표됐다. 이후 인파 관리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이 본격 추진되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지난달 20일 그간 국회에 발의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개정안 22개를 통합·조정해 의결하고 법제사법위원회로 넘겼다. 이 법안은 다중이 참여하는 지역축제의 개최자가 없거나 불분명한 경우 지자체장이 안전관리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행정안전부가 실시하는 재난 안전관리 교육을 받도록 의무를 부여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행안부 관계자는 “법 개정 이전까지 대책 회의, 현장점검 등 안전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국회에서 통과되는 즉시 시행령·매뉴얼 개정 등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행사장에서도, 일상에서도 달라졌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서울세계불꽃축제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이태원 참사 이후 처음 열린 대형 옥외 이벤트였다. 행사에는 경찰과 주최 측 요원 등 안전 관리에 6000명이 투입됐는데, 지난해 불꽃축제와 비교하면 60% 늘었다. 한강공원 약 10m 간격마다 1명씩 봉사자와 안전요원이 위치했고, 예년에도 이뤄졌던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 무정차 통과 등 혼잡 관리를 위한 대책도 시행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민 스스로 안전 확보에 힘을 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당시 현장에 배치됐던 일선 경찰관은 “인파가 급격히 몰릴 때마다 시민들이 안내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자’고 외치거나 발걸음을 멈추고 앞 사람과의 간격을 벌렸다”며 “그만큼 조심해서 이동하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당시 가족과 행사장을 찾았다는 박재선씨(36)는 “사람이 워낙 많아 혼잡했지만, 안전을 위해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이동했다”며 “통로 곳곳이 통제돼 먼 길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안전을 위한 거라 크게 불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대규모 행사가 아닌 일상 속에서의 인식도 달라졌다. 지하철이 대표적이다. 이태원 참사 이전에는 사람들로 꽉 찬 전동차에 어떻게든 타기 위해 막무가내로 밀거나 끼어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도 혼잡한 출퇴근길은 여전하지만 무질서한 상황까지는 잘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전했다. 일상생활에서 안전의식과 압사 사고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직장인 이선주씨(32)는 “예전에는 퇴근길 지하철이 꽉 차 있어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어떻게든 타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니다”며 “인파에 조금만 휩쓸려도 사고날까봐 예민해진다”고 말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지하철 혼잡도를 줄이고자 열차 증차를 비롯해 안전인력 배치, 안전시설물 보강 등을 추진하고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태원 참사는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안전에 대해 경각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며 “현실적으로 수도권 지하철 등 과밀 문제가 해결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의식 변화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 위협’ 불법건축물 단속도 강화= 이태원 참사 이후 피해를 키운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 불법 건축물에 대한 단속도 강화됐다. 참사 당시 해밀톤 호텔 본관 주변에 불법으로 세워진 가벽 때문에 골목 폭이 좁아져 병목현상을 키웠다는 지적이 나왔다. 호텔 대표 이모씨와 호텔 운영 법인 해밀톤관광 등은 건축법 및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지난 3월부터 재판을 받고 있다. 지난달 열린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이씨에게 징역 1년, 해밀톤관광에는 벌금 3000만원을 구형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위반건축물 특별점검을 시행했다. 신촌, 홍대 등 75개 구역을 자치구별로 현장점검해 불법 건축 및 무단 적치물 위반행위 2611건을 적발했다. 이 중 1728건은 시정조치 됐다. 용산구는 참사 이후부터 현재까지 총 773곳의 건축물을 점검해 불법 건축물 97곳을 적발했고 이 가운데 42곳은 원상회복됐다. 서울 각 자치구는 특별점검을 비롯해 분기별로 1년에 4번 정기 점검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시정조치 요구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서울시는 특별 점검 결과에서 883건이 시정되지 않아 이행강제금 부과 등 행정조치를 진행했다. 용산구청도 자진 시정되지 않은 44건에 대해 총 1억7000만원 상당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했다. 지자체가 직접 원상회복을 하는 행정대집행도 있지만, 사유재산 문제 등으로 쉽지는 않다. 서울 한 자치구 관계자는 “자체 시정을 기다리지만, 결국 불이행하면 담당 공무원 판단으로 수사기관에 고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불법 건축물이 공공의 안전을 침해할 수 있는 만큼 엄정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김도년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는 “해밀톤호텔과 같이 안전에 심각한 우려를 야기하는 경우 강력한 시정 조치가 필요하다”며 “확실한 원상회복 기간을 주고 시정이 안 된 경우 강제집행을 하는 등 법에 따른 조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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