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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의존도가 높은 필수예방접종 백신의 국산화를 위해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고난도 제조기술과 막대한 비용투자, 낮은 수익성을 무릅쓰고 필수 백신 개발에 도전하는 국내 기업들을 위해 연구개발(R&D) 예산을 과감히 늘리고, 규제완화를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25일 종합국정감사에서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을 향해 “대한민국이 그래도 경제 10위권 안에 드는데 코로나19 당시 너무도 창피한 일을 많이 겪었다. 백신을 구걸하려 대통령까지 나갔는데 깜깜이로 매수 수량도, 금액도, 납기일도, QCD도 모르는 수모를 당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글로벌 백신 허브화 조기 달성을 주창하지 않았나. 백신 주권 국가로서의 직위를 확보하려면 관련 R&D 예산을 대폭 늘려야 한다고 본다. 장관이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이에 조 장관은 “2024년 예산에 ‘한국형 ARPA-H’라고 하는 사업을 새로 도입한 만큼 백신 주권 확보를 잘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답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논외로 치더라도 백신은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전 세계 백신 시장은 소수의 다국적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영국 기업인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와 미국 머크(MSD)를 필두로 프랑스의 사노피, 미국의 화이자 등 4개사가 전체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하는 구조다. 높은 접종률을 자랑하는 국가필수예방접종(NIP) 사업의 이면에는 백신 자급화율이 30%에 그치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 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2022년 8월 기준 NIP 백신 22종 중 순수 국내 제조는 B형 간염과 파상풍·B형 헤모필루스 인플루엔자·수두·인플루엔자·신증후군 출혈열·장티푸스 등 7종에 불과하다. 피내용BCG·일본뇌염(생백신)·폐렴구균 10가·사람유두종바이러스2가·홍역/풍진/유행성이하선염 등 10종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지에서 백신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실제 지난해 전량 수입에 의존해 온 백일해(보르데텔라 백일해균에 의한 감염으로 발생하는 호흡기 질환) 백신이 동나면서 생후 2개월 영유아, 임신부 등 NIP 대상자들이 접종을 못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2021년 GSK가 가격협상 결렬로 철수하며 사노피가 독점 공급하는 가운데 실험 보완을 이유로 공급을 중단하자 대안이 없어진 탓이다.
LG화학(051910)이 백일해균의 특정 항원을 적용한 ‘정제 백일해’를 기반으로 DTaP(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과 소아마비·뇌수막염·B형간염의 6개 감염병을 예방하는 백신 개발에 착수했지만, 아직 임상 1상 단계에 머물러 있다. LG화학이 내세운 국내 상용화 목표 시점은 2030년이다.
진료 현장에서도 백신 수급 불균형에 따른 애로사항이 많다. 조혜경 이대목동병원 소아청소년가 교수는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이 접종하는 백신 중 국내 생산이 불가능해 글로벌 제약회사에 의존하는 품목들이 있다. 국내에 들여오기 위한 절차들이 많다 보니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사업을 접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필요한 절차인 건 맞지만 백신 공급 자체가 제한되면 결국 아이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 특정 회사 한곳이 공급하는 상황을 최소화하고 수요와 공급이 원활한 환경이 조성되길 바란다”고 언급한 바 있다.
백신 독과점에 따른 폐해는 시장 가격에도 반영된다. MSD는 자궁경부암 백신 ‘가다실9’의 가격을 2021년 4월 15%, 2022년 6월 8.9% 등 2년 연속 인상했다. 가다실9는 자궁경부암을 비롯해 9가지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유형에 의한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다. 3회 접종을 완료할 경우 총 접종비용이 80만 원대에 육박하지만, 경쟁 품목이 등장하지 않는 한 가격인상을 제한할 길이 없다.
백신 개발은 다른 의약품과 마찬가지로 후보물질 탐색부터 전임상시험, 임상시험, 규제 기관 승인의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대략 10~15년이 소요된다. 신속한 백신 개발을 유인하려면 다국가 임상에서 내국인 참여 비율을 낮추는 등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날 강 의원은 식품의약품안전처를 향해 “많은 국내 기업들이 백신 개발에 뛰어들면서 다국가 임상을 진행 중인데 내국인 참여율을 10% 권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굉장히 높게 돼 있다”고 짚었다. 이어 “내국인 비율을 5% 정도만 낮춰도 백신 개발이 한 2~3년 단축된다는 이야기가 있다”며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당부했다. 오유경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다국가 임상의 내국인 참여 비율은) 의무가 아니라 권고”며 “개발사가 통계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면 (내국인의 참여 비율은)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백신 개발과 관련해 적극적으로 업계의 말을 듣고 규정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강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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