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커창 전 중국 총리 [AP] |
[헤럴드경제=김우영 기자] 27일 사망을 리커창 전 중국 총리는 1955년 당 간부 집안에서 태어나 베이징대를 나오는 등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경제수장으로 평가된다.
그는 고향이 안후이(安徽)성이고 정파도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파로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과 같아 ‘리틀 후’로 불렸다. 리 전 총리는 대학 졸업후 공청단 중앙에 들어가 당시 상무서기이던 후 전 주석과 함께 근무하면서 각별한 인연을 쌓았으며, 불과 38세에 장관급인 공청단 중앙 제1서기에 올라 5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리 전 총리는 공직 생활 와중에도 경제 공부에 열중해 1991년 ‘중국 경제의 3원구조’라는 논문으로 중국경제학계 최고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을 받았다. 이후 1995년엔 베이징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44세의 나이로 허난(河南)성 성장 대리 겸 부서기로 임명됐다. 역대 최연소 성장으로, 리 전 총리는 낙후한 농업지대에 불과하던 허난성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2004년 동북지방 경제발전 임무를 맡고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발탁된 뒤 지역 경제성장률을 13년만에 최고치로 끌어올리며 중앙 무대 진출의 발판을 닦았다.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당시 상하이시 서기와 함께 나란히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며 차기 최고 지도자 물망에 올랐다.
2017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왼쪽)과 리커창 총리 [EPA] |
하지만 이듬해 3월 시 부주석에 밀려 부총리에 임명됐다. 이후 상무부총리로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함께 시장 기능을 강화하고 경제구조 개혁을 추진하면서 중국을 글로벌 G2의 반열에 올려놓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후 2013년엔 국가서열 2위 국무원 총리에 올랐다. 표면상 시 주석에게 밀린 형국이지만 경제와 민생 운영은 여전히 리 전 총리가 주도했다.
그렇지만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하면서 중국 안팎에서 리 전 총리에 대한 책임론이 제기됐으며, 특히 2015년 중국 당국이 추진한 환율공시제도 개혁이 대규모 외환보유고 축소라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면서 리 전 총리의 위상은 급격히 하락했다.
이후 그는 2020년 전국인민대표대회 기자회견에서 중국의 빈부격차를 직접 언급하고 코로나19가 확산세를 보이던 2022년엔 “방역 지상주의가 경제를 망쳐선 안된다”고 지적하는 등 시 주석을 비판하는 발언을 이어왔다.
지난 3월 10년 임기를 마친 리 전 총리는 고별 연설에서 “사람들은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天在看)’고들 말한다”고 언급해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를 비판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리 전 총리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지한파로 분류된다. 한·중 수료 2년 후인 1994년 공청단 제1서기로 한국을 처음 찾았으며 이후 2006년 랴오닝성 당서기 재임 시 다시 방한했다. 2011년엔 국무원 부총리로 남북한을 잇달아 방문했다. 2015년엔 4번째로 방한해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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