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조카 J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결혼식이 드문 요즘 결혼식에 초대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요즘 세태에 결혼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결혼도 출산도 아니 연애도 하지 않아 이러다 국가가 소멸된다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청년 결혼식에는 국가에서 결혼 장려금을 주어도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은 예나 지금이나 일가친척이 다 모일 수 있는 경사스러운 축제이기 때문에 결혼식이 가져다 주는 사회 경제적 효과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이런 행사를 청년에게 비용을 전부 부담시킨다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 선물로 내집마련 전세금을 지원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J는 남다른 성장과정을 거쳤다. 태어나 1년도 채 되기 전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자랐고, 어느 정도 커서는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도 사업 실패로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실부는 다시 외가에 양육을 부탁했다고 한다. “외가에서 돌보지 않으면 고아원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동생은 조카를 품었다고 한다. 본인도 남편과 사별한 가운데 두 아들을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딸을 하나 더 낳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다고 한다.
결혼식장에서 엄마의 자리에 앉아 기쁘게 시집 보내는 조카를 아니 자신의 딸을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이 무척 장해 보였다. 소설같이 아름다운 한 가족을 보는 듯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훌륭하게 자란 조카들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이것이 사랑이지. 이것이 가족이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사촌 작은집 현관에 붙어있는 문구다. 다소 촌스럽지만 예전에는 어느 집이나 허름한 식당에도 걸려있던 문구다.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가정이 화평해야 가족들이 심리적인 여유를 갖게 되고 얼굴 표정도 밝으니 사람들은 이런 가정을 좋아하게 되고 이런 집에 복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웃으면 복이온다 笑門萬福來라는 문구도 많이 걸려 있었다.
물론 예전에도 각 가정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이 있었지만 가화만사성을 이루기 위해 가족 구성원 모두가 노력했다. 가정만이 아니라 온 사회가 그런 분위기였다. 대다수의 가정에는 집이 좁아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셨고 손자손녀까지 3대가 함께 사는 가정이 많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핵가족이 되더니 요즘은 핵분열이 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가정 내에 있던 노인, 청소년, 유아 양육을 사회가 떠맡게 되면서 노인복지, 청소년교육, 유아보육 등이 사회문제가 되어버렸다. 가정 내에서 화목과 화평을 이루며 행복의 원천이 되어야 할 존재들이 어쩌다 사회의 문제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사유 재산의 “소유”라 지적했다. 인간은 소유라는 관념을 통해 자신의 재산과 남의 것을 구별하게 되었고, 자기 보존욕구에 따라 자기 재산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었다. 뒤이어 기술과 도구의 사용으로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각자 소유하는 재산의 많고 적음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이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광대한 숲은 인간이 땀으로 적셔야 할 경작지로 변했고 이로부터 예속과 비참이 싹트고 증가하게 되었다. 정치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정부를 가지게 되는 바로 그때가 인류에게는 자연 상태와의 결별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생존욕구로부터 소유욕구로 바뀌게 된다. 즉 남의 것을 빼앗아 소유하려는 준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 사회는 토머스 홉스의 말처럼 이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으로 변해 버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연히 가진 자, 즉 힘센 자가 지배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가 된다. 갈수록 힘센 자의 지배는 강화되고 가난한 자, 즉 약한 자의 의무는 커간다. 그리하여 사회 속의 구성원 간의 인간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굳어져 버린다.
이처럼 자연 상태의 인간 본성은 천성적으로 선하나, 사회 상태의 인간은 사악하다. 인간을 이렇게 타락시킨 장본인은 인간이 이룩한 발전과 인간이 획득한 지식이다.
그렇다면 자연 상태를 벗어난 인간이 순수하고 행복했던 그 ‘미개인의 신화적인 이미지’를 되찾는 길은 무엇인가? 아니, 그것까지 되찾지는 못할지라도 약한 자가 힘센 자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이 사회계약론이다. ‘자신의 힘과 자유를 일반의지에 양도’함으로써 법 앞에서의 평등과 그 속에서 시민의 자유를 누리는 사회를 루소는 그리고 있다.
우리 사회는 현재 루소가 이야기하는 대로 물질적 소유가 최고의 생존가치가 되어버렸다.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가정 내에 조부모, 부모, 손주 이 3대가 어울리며 살아가면서 윤리와 교육 그리고 복지라는 가정의 가치를 유지해 왔지만 지금은 물질적 소유가 이 가정의 가치를 형편없고 후진 것으로 폄하해 버렸다.
가정에서 조부모, 부모, 손주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고 자녀, 형제, 부부, 부모의 사랑을 체험하며 인간다움을 배우는 곳인데도 말이다.
인구소멸, 국가소멸, 이제는 이 문제를 남의 이야기로 볼 것이 아니라 당장 우리 현실의 문제가 되었다. 물질적 소유와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 믿음이 강할수록 가정의 가치는 약화되고 가정은 무너져왔다. 효, 사랑, 눈물, 땀이 어우러지는 가정이라는 아날로그의 질척한 문화보다는 디지털 문화의 깔끔함에 도취되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많은 사람들은 갖고 있다. 휴대폰 하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편리한 기술에 적응해 갈수록 한편으로는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감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이런 불안은 더 커져갔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공감능력의 차이였다. 이제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의 대면관계보다는 사회관계망(SNS)을 통한 접촉을 더 선호하게 되었다. 가정 내에서나 사무실 내에서조차 대면접촉보다는 인터넷상의 대화를 더 선호하고 있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하면서도 손에서는 쉴 새 없이 문자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는 가족 간이나 교실에서 학우들과의 대화가 어색해지고 예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의한 SNS 의존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까지 통제되고 조작될 수 있다. 이미 SNS를 통해 나의 취향과 패턴을 파악한 인공지능은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제안하기 때문에 내가 가고 싶은 곳, 사고 싶은 것을 조작당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순응해 가게 되는 것이다.
공감능력과 자율성을 잃은 인간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역사를 통해 자유를 얻기 위해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투쟁해 왔던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요즘도 사람을 사랑하기 어려워하고 애완동물에 더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데 인류애가 지속될 수 있을까.
인간이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기 때문에 가정은 해체되고, 가정이 해체되니 당연히 출산은 줄어드는 것이다. 출산의 급격한 감소는 가장 확실하게 현실적으로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당장 현실적으로 내년 입학생 수는 386만으로 갑자기 100만명이 줄어든다. 그리고 그 이후 해마다 20만명씩 줄어들어 6년 후에는 236만명으로 줄어든다. 지금 학생 수의 절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학교문제, 군대문제, 노동인력문제가 매우 심각해지는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문제를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지도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치기반을 만드는 지역기반이 인구다. 이 나라 안보를 지켜낼 군인들이며, 회사의 사원이며 물건을 사줄 소비자다. 사람이 있어야 지속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 당장 학교는 어떤가. 이제 몇 년 후면 지금의 학생 수가 반토막이 될 것이다. 교육감들은 교사 생존을 위해서라도 미래 학생들 모집을 위해 청년들에게 읍소해야 한다.
가화만사성, 어렵거나 심오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 문구가 가정마다 걸려있을 때 우리 가정은 건강했고 우리 사회는 활력이 넘쳤다. 가정이 있었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도 살아갈 힘이 있었다.
가정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 좀 더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라도 가정의 가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경제도 안보도 교육도 부동산도 가정만큼 시급하지 않다. 가정이 무너지면 다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소개 – 최근 수년간 일용직 건설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노동 현장의 일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 왔다. 현재는 글로벌피스재단에서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절차탁마의 정신을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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