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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불타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너무나 위험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같은 이들을 더 대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난 23일(현지시간) 미 공화당의 실제 중진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이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유는 하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소수 강경파의 입김에 휘둘려 자신들의 손으로 뽑은 의장을 쫓아낸 것도 모자라 새로운 의장을 뽑지도 못하는 희대의 난맥상을 3주째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까지 미국 하원은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은 고사하고,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규탄하는 결의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의장 선출 과정에서 공화당 내 내분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의원들끼리 서로를 비방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반대파 의원을 차단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이자 강경파로 분류되는 짐 조던 법사위원장에 대한 의장 선거 때는 반대표를 던진 일부 의원들에게 살해 위협과 전화 공세가 쏟아졌다. 3번째 후보로 나선 톰 에머 원내총무는 트럼프가 ‘RINO(Republican In Name Only·가짜 공화당원)’라고 낙인을 찍자마자 맥 없이 사퇴해 버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라 평가 받던 미 의회 정치의 부끄러운 민낯에 미 언론은 물론 워싱턴 DC의 수많은 인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존슨은 누구인가?(Who is Johnson)’라는 기사를 쏟아지게 만든 마이크 존슨 의원이 의장으로 선출되며 하원이 가까스로 정상화됐다. 하지만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진 존슨 의장 선출로 트럼프의 ‘상왕 정치’는 다시 한번 확인됐다. 존슨 신임 의장은 초강경파로 불리는 ‘프리덤 코커스’는 아니지만 트럼프 탄핵 당시 변호를 맡았고,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의 법적 논리를 만들었다. 하원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피로에 찌든 주류 공화당 의원들이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한 셈이다. 미 의회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지금 공화당은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에게 끌려가고 있다”면서 “어지러운 워싱턴과 망가진 의회는 대통령의 힘을 강화하고 싶은 트럼프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처럼 질서 없는 미국 의회 앞에 너무나 많은 난제가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당장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의회에 요청한 예산은 1,050억 달러(약 142조 6,000억원)로, 한해 국방 예산의 8분의 1에 달하는 규모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이 ‘2개의 전쟁’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방 정부 폐쇄(셧다운)를 막기 위한 임시 예산안도 11월 17일 만료 예정으로 셧다운까지는 20일도 남지 않았다.
나라 밖의 상황도 아슬아슬하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지난 22일 남중국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벌이는 중국과 필리핀의 선박이 충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상당한 긴장감이 감돈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팔 전쟁에 이어 중국이 개입된 분쟁까지 터질 경우 미국이 이를 감당할 수 없으며, 전 세계적으로 ‘힘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미국은 9.11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그래서 글로벌 안보의 위기와 떼어 놓을 수 없다. 서로 싸우다가도 위기 앞에서는 초당적으로 뭉치며 정부에 힘을 실어줬던 미국 의회가 지금은 안에서 곪고 있다. 다수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소수의 강경파가 득세하며, 트럼프의 마가(MAGA) 극단주의는 의회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중국은 미국의 빈 자리를 노리고 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의회 정치는 미국의 소프트 파워인 동시에 리더십을 유지하는 강력한 힘이었다”면서 “지금의 미국이 과연 동시 다발적인 국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냐는 의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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