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냉전 이후 다시 세계 ‘블록화’ 가속
국가별 이해관계 따라 ‘이합집산’
수출국·품목 쏠린 한국 무역엔 약점
다변화 바탕 경쟁력 키우는 게 살길
세계화의 훈풍은 끝난 듯하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 붕괴 이후 시작한 탈냉전 시대가 불과 30여 년 만에 ‘블록화’라는 새로운 대립 구도로 변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신냉전 또는 탈세계화 시대라 표현한다. ‘각자도생, 이합집산’의 시대가 열렸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분쟁이 촉발한 블록화를 마크서 와그너 호주 울런공대 교수는 무역(교역)이 무기가 된 시대라 지칭했다. 실제 미국과 중국은 각자 가진 무기로 무역에서 총칼 없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후폭풍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은 각자도생을 더욱 공고히 했다. 세계화 30년 동안 만들어진 관계망을 바탕으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고 때론 그 반대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나라마다 특정 국가와 기업을 대상으로 표적 규제를 내놓는가 하면, 상품과 투자 진입장벽을 높여 보호무역을 공고하게 한다. 선·후진국 구분 없이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식의 경제가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하마스)은 전쟁 중이고, 유럽연합(EU) 또한 급변하는 세계 경제 질서 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기 바쁘다.
신냉전, 각자도생 시대의 도래는 대외 무역 비중이 큰 한국 경제가 장기적 정책·전략의 변화를 도모해야 할 때가 됐다는 의미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연)가 한국무역협회 통계와 유엔(UN) 국제무역 통계를 활용해 주요 국가들의 수출 품목 집중도를 계산한 결과, 한국은 779.3p로 세계 10대 수출국(평균 548.1p)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다음으로는 일본(753.0p), 중국(640.2p), 캐나다(621.5p), 벨기에(584.1p), 독일(529.7p) 순으로 수출 품목 집중도가 높았다. 10대 수출국 중 품목 집중도가 가장 낮은 나라는 네덜란드(372.1p)로 한국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의 수출 약 40%는 중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한다. 한경연에 따르면 한국 수출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24.5%다. 미국은 15.25% 수준이다. 전체 수출 대비 수출 상위 5개국에 대한 비중은 58.6%로 캐나다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특정 국가 몇 곳에 수출이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다.
수출품 쏠림현상도 심하다. 한경연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조사한 결과 전기장치·기기가 차지하는 수출 비중은 20.2%라고 밝혔다. 자동차도 10.5%로 높았다. 상위 10대 수출 품목의 수출액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 (68.7%로 세계 10대 수출국 가운데 가장 높았다. 특정 품목 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수출구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한국은 그동안 반도체 중심 경제성장을 해 왔다. 수출국은 미국과 중국이 절반 가까이 차지한다.
그동안은 미·중 양국 중심 수출 전략이 먹혀들었다. 엄청난 규모의 내수를 바탕으로 급성장한 중국은 한국의 수출기업에 기회의 땅이었고, 광복 이후 최고 우방인 미국은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파트너다.
다만 세계는 변하고 있다. 앞으로 변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전문가들이 지금처럼 미국과 중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한경연은 한국처럼 특정 품목과 국가에 대한 수출 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대외 환경 변화로 인한 수출 충격을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경연은 “팬데믹과 미·중 무역분쟁 심화 등으로 중국 중심 글로벌 가치사슬(GVC)이 재편되고, 4차 산업혁명 가속화로 새로운 먹거리가 다양하게 등장하는 등 최근 국제통상 환경 변화 흐름은 특정 품목·국가 집중도가 높은 한국 수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2018년 이후 5년간 한국 수출 연평균 증가율은 3.6%에 그쳤다. 세계 10대 수출국(6.1%)과 크게 차이 난다. 한경연은 “한국이 최근의 글로벌 불확실성 요인 확대로 인한 수출 타격을 상대적으로 크게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수출이 한국 경제 버팀목 역할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특정 품목·국가에 편중된 수출구조 개혁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적극적 수출시장 다변화 노력과 함께, 연구개발(R&D) 등 민간 혁신 지원 확대를 통해 경쟁력 있는 품목을 다양하게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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