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질의 일자리 확대해 경제 선순환 구조 만들어야
과도한 노조권한 보호, 노사간 힘의 불균형이 미래세대 일자리 위축 원인
노동유연성 제고, 연공서열식 임금체개 개편 등 노동개혁 지속 추진해야
언제부터인지 ‘대기업 정기 공채’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 중 삼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과거 상‧하반기로 나눠 실시하던 정기 공채를 없애고 수시채용으로 전환했다.
그만큼 채용문은 좁아지고 있다.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감소로 일할 사람은 적어지지만 청년들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부족한 미스매치 현상이 심각하다.
어떤 정부건 ‘민생’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아무리 정의롭고 설득력 있는 정치적 이념을 내걸어도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 국민은 등을 돌린다.
민생의 핵심은 일자리다. 모든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갖고 돈을 벌어 소비하는 선순환의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게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윤석열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정진해야 할 부분도 양질의 일자리 확대다.
尹 대통령, 일자리 중요성 강조했지만…여전히 갈 길 멀어
윤석열 대통령도 줄곧 일자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그는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정부 출범 1년 6개월 만에 민간 주도로 52만6000명의 신규 취업자가 증가했다고 밝히면서 “저는 대통령 선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국가 경제 사회 정책의 최우선이 일자리 창출이라고 강조해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이 체감하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인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가 지난 9월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2023년 하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 64.6%는 올해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수립하지 못했거나, 채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수립한 35.4%의 기업들 중에서도 전년 대비 채용 규모를 줄이겠다는 기업은 24.4%에 달했다. 더 늘리겠다는 기업은 17.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현상 유지’였다.
올해 대졸 신규채용 예상 경쟁률은 평균 81대 1로 조사됐다. 30~60대 1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29.7%로 가장 많았다.
500대 기업에는 주요 대기업 그룹 계열사들과 매출 상위권 중견기업들이 포함돼 있다. 이들이 채용 문을 좁힌다는 건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줄었음을 의미한다.
기업들에게 무작정 채용 확대를 강요할 수도 없다. 기업은 사업 규모가 확대되거나 앞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있어야 채용을 늘린다. 이와 함께 채용된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여건이 돼야 한다. 규제개혁과 세제지원 등 기업의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각종 정책들이 거론되지만, 무엇보다 노동개혁을 통한 ‘노조 리스크 제거’가 시급하게 요구되는 이유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달 18일 방문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기업 활력 제고와 산업 경쟁력 강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노동개혁을 제시했다. 그는 “노사관계 안정을 도모하고 미래세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노동개혁이 시급하다”면서 “정부가 주요 국정과제로 삼고 있는 노동개혁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산업부에서도 적극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다.
노조 리스크, 노동시장 경직성이 일자리 확대 걸림돌
우리 기업들은 매년 임금‧단체협약(임단협) 시기마다 노조 리스크에 시달린다. 한 해의 절반 이상을 교섭에 매달리는 기업도 있고, 그 과정에서 노조의 파업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거나, 파업을 지렛대로 한 노조의 무리한 요구로 어려움을 겪는다.
노조 쟁의행위에 대한 기업의 방어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노조가 회사 시설물을 점거해도 생산시설이 아닌 경우에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회사 사옥 로비나 사장실 점거 등의 행위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다. 심지어 법의 맹점을 악용해 생산시설의 출입문을 점거해 사실상 생산을 중단시키는 경우도 발생한다.
노조 파업시 대체인력으로 공장을 가동할 방법도 막혀있다. 임시 인력이나 하도급 등 회사에 직접고용되지 않은 인력의 대체근로를 금지하고 있는 노조법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대체근로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찾기 힘들다.
이처럼 채용한 인력 자체가 리스크 요인이 되는지라 채용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회사는 채용 확대를 꺼리는데 노조가 채용을 늘리라고 회사를 압박하는 비정상적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면서 “채용된 인원이 노조의 힘을 키우고 그게 기업엔 리스크 확대로 이어진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도 기업들로 하여금 채용을 꺼리게 만드는 큰 원인 중 하나다.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유연성은 141개국 중 97위, OECD 36개국에서는 34위로 최하위다.
근로기준법상 해고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업무능력 부족이나 적격성 결여 등의 문제가 있어도 해고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심지어 해사행위를 저질러도 법적 근거가 없어 고용을 유지하거나 해고하더라도 법적 분쟁을 통해 다시 받아들여야 하는 일도 종종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입법을 추진 중인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은 기업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 축소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주요 경제단체들은 지난달 18일 공동 입장문을 내고 “사용자 개념을 무분별하게 확대하고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원‧하청 간 산업생태계를 붕괴시키고 산업경쟁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켜 양질의 일자리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내기업들의 투자뿐만 아니라 해외기업들의 직접투자에도 큰 타격을 초래해 일자리가 더 줄어들 것이라고도 했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도 청년 일자리 확대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동안 임금체계를 직무‧성과 중심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이 역시 노조의 권한보호에 치우친 현행법이 발목을 잡는다.
현행법상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은 ‘집단적 동의’를 요건으로 하고 있어 통일적 근로조건 변경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조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임금체계 개편도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국내 주요 기업 노조는 근속연수가 긴 생산직 중심으로 구성돼 있어 기존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를 선호한다. 이들에게 임금체계 개편 동의를 기대할 수는 없는 실정이다.
재계에서는 ‘전체 근로자의 임금총액이 저하되지 않는 등 상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 집단적 동의 요건을 적용하지 않고 의견 청취로 갈음할 수 있도록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노동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일부 성과는 있었지만 소수 여당의 한계로 여러 측면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당위성을 강조하는 데만 매몰돼 세심한 설득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는 “노동개혁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가 여러 노력들을 해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노조 회계 투명성 부분에서 성과를 내면서 노조 조합비가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는 길을 막았다는 점은 다행인데, 근로시간 개편의 경우 방향성은 맞았지만 (대중) 설득에 실패해 과로사회로 끌고 가는 것처럼 비쳐지면서 잘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앞으로 주력해야 할 부분은 노동유연성을 제고하는 부분인데, 파견근로와 대체근로 허용 등의 문제를 시급히 풀어야 하고, 연공서열식 임금체계도 뜯어 고칠 필요가 있다”면서 “무엇보다 노사간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노사관계에서 ‘무기대등의 법칙(equal footing)’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게 노동개혁의 성과를 좌우할 큰 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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