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의 대장간은 역사성과 희소성을 평가받아 천호동 동명대장간, 전농동 동광대장간, 대조동 불광대장간, 수색동 형제대장간 4곳이다. 장인의 경력을 기준으로 모두 50년 이상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도심 개발과 함께 서울의 대장간은 대부분 사라져 그 수는 이제 손에 꼽힐 만큼이 됐다. 오랜 세월 부단한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온 서울의 전통 제조업이자 시민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대장간의 면면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행한 ‘서울의 대장간’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무기제조에서 출발한 서울의 대장간
과거부터 금속은 인류 문화가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금속을 다루는 기능인들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직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그들을 야장(治匠)이라 불렀고, 야장은 관영수공업체제 아래에서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전국의 야장은 총 710명으로 서울에 424명, 지방에 286명이 있었다. 전체 야장의 약 60%를 차지하는 서울의 야장들은 공조(工曹), 군기시(軍器寺), 상의원(尙衣院), 교서관(校書館), 선공감(總工監), 내수사(內需司), 귀후서僚룹厚署)에 소속되어 의례, 무기 등 각종 철물을 생산했다.
조선 후기 관영수공업이 해체되면서 군기시를 중심으로 한 무기 생산 역할이 각 군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과 증설된 군영은 자체적으로 공장시설을 갖춰 무기를 생산했다.
현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자리한 을지로7가 2-1번지는 훈련도감 동영이 있었던 곳이다. 조선시대 동영을 비롯한 훈련도감에 소속된 야장은 140명이었다. 지금의 세운스퀘어(세운상가) 부근인 인의동 112-2번지는 어영청이 있었던 곳으로 이곳에서도 무기를 제작했다.
해방 이후 대장간의 중심지 을지로7가
1907년 정미7조약의 결과로 훈련원이 해산되었고, 야장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많은 대장장이는 계속해 을지로7가 일대에 자리 잡았고, 우리나라 철물 산업의 중심지이자 대장장이를 양성하는 교육의 장이 됐다.
1970년대 말에는 이곳에 70여 곳의 대장간이 있었다. 1980년대까지도 공사장에서 쓰이던 해머 같은 연장을 두드려 만들어 팔던 대장간이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1970~1980년대 서울운동장 확장과 지하철 공사 과정에서 대다수 대장간이 철거됐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7가에 모여 있던 대장간은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고, 일부는 중구 신당동 일대에 터를 잡았다. 1980년에는 서울운동장 뒤편 신당동 일대에 20여개의 대장간이 있었지만, 현재는 충남대장간, 경남대장간 2개의 대장간만이 남아 있다.
산업화와 서울의 대장간
1970년대 정부는 우리나라의 농업 능률을 향상하기 위해 공장제 농기구의 보급과 농기계 생산을 촉진했다. 이어 1970~1980년대 도시개발은 중기계산업, 공작기계산업의 성장을 불러일으켰다.
건설현장의 기계화와 더불어 1990년대 중국산 제품이 등장하면서 대장간은 존폐의 갈림길에 섰다. 중국산 공장제 제품의 등장은 실질적으로 철물 수요 시장의 경쟁자 등장을 의미했다. 중국산 공장제 제품은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급속도로 시장을 확장했다. 이로써 철물의 공급처는 국내산 공장제, 중국산 공장제, 대장간 생산품의 구도로 나뉘었고 시장은 삼분되었다. 삽, 가래와 같은 농기구, 배척(빠루), 망치의 경우 중국산은 국산보다 최고 85%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어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 더해 대장간의 수가 줄어들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인력 감소였다. 대장간의 업무 강도가 높은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1970~1980년대 대장간 노동자들은 공무원에 준하거나 그 이상의 급여를 받았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대장간 일을 기피한 것은 도제식 교육에 입각한 기술 습득과 채용이 인력난의 주된 원인이었다.
인력난에 따른 생산력 저하는 대장간의 경영 기반을 흔들었고, 1980년대 이미 서울에선 대장간을 ‘옛 정취’로 취급하고 있을 정도로 대장간이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전통적 대장간의 인력과 공간 구성
근대화 이전 대장간은 집게잡이, 메질꾼, 풀무꾼, 심부름꾼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을 했다. 집게잡이는 ‘대장’이라고도 불리며 대장간의 총괄 업무를 담당했다. 메질꾼은 크고 무거운 쇠메를 들고 달군 쇠를 늘리는 작업을 했다. 풀무꾼은 화덕에 바람을 넣어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업무를 맡았다. 심부름꾼은 대장간의 가장 막내로 허드렛일을 돕고, 나중에 풀무꾼이 된다.
대장간을 구성하는 필수 도구인 화덕, 풀무, 모루, 물통 등은 집게잡이를 중심으로 배치된다. 화덕에서 달군 쇠를 꺼내 모루에 올려 메질하고, 물통에 넣어 담금질할 수 있는 최적의 동선을 통해 작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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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래유산 지정 대장간
2021년 현재 서울에 있는 대장간은 10곳이다. 서울에는 대장간과 관련해 지정된 유·무형의 문화재가 전무하다. 다만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대장간이 있다. 이중 대장간 4곳이 시민생활 분야로 지정되어 있다. 2013년에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 한 불광대장간이 첫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5년에는 강동구 천호동의 동명대장간, 은평구 수색동의 형제대장간, 동대문구 전농동 동광대장간이 지정됐다.
동명대장간은 강동구 천호동에 있고, 강남 4구의 유일한 대장간이다. 1940년대 초반 강원도 철원에서 1대 강태봉이 상경해 해방 이전 지금의 장소에서 동명대장간을 창업해 현재까지 3대째 운영하고 있다.
현재 동명대장간의 가장 큰 과제는 공간이다. 대장간 대표 강단호는 철물점을 더욱 확장하고, 체험 공간을 만둘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당장은 공간 확장의 한계와 시공기간 등의 문제로 실행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에 더해 활발하게 진행 중인 천호동의 재개발 사업도 동명대장간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도 강단호는 동명대장간의 100년 가업을 목표로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약 대장간 주변이 모두 아파트촌이 된다고 하더라도 방음, 방진 설비를 최대한 구비하여 현재의 위치를 고수할 예정이다.
어렸을 때 대장간은 주로 밤에 일이 다 끝나면 왔어요.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니까 위험한 것도 있고. 제가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서 낮에 대장간에 와본 기억이 없어요. 그러다 좀 커서는 가끔 대장간에 나와서 아버지 바쁘시면, 물건 계산하는 정도로 도와드렸어요. 예전에는 아버지가 대장장이라는 것이 창피했어요. 옛날에 대장간 같은 일을 삼디(3D) 업종 이라하잖아요. 그래서 이런 일 하면 부끄럽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생각은 중학교 때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가서는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되었어요.
강단호 동명대장간 대표
불광대장간은 은평구 대조동에 위치한다. 강원도 철원에서 상경한 박경원이 돈암동, 미아리 을지로7가 대장간에서 일하며 기술을 익혀 1960년대 중반 불광초등학교 개천가에서 이동식 대장간을 연 데서 시작했다. 1973년 서울서부시외버스터미널 앞에 불광대장간을 개업했으나 개발로 인해 1978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2대째 운영하고 있다. 현재 불광대장간은 지하철 6호선 불광역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주택가에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불광대장간의 대를 잇는 박상범의 향후 목표는 아버지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아버지가 홀몸으로 상경해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아온 것처럼 박상범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현재의 불광대장간은 지금의 대장간을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60만원 모아서 불광동 불광초등학교 개천 옆에 대장간을 리어카 놓고 했어요. 그때 주변에 뭘 지어서 아침부터 7~8명이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장사가 잘됐어요. 당시 쌀 한 가마가 3만 원 할 때인데 하루 벌면 7~8만원 벌었어요. 이때부터 돈이 벌리기 시작해서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홍은동에 산꼭대기에 방 2개, 마루, 부엌이 있는 집을 지어서 살았어요.
박경원 불광대장간 대표
형제대장간은 은평구 수색동 수색역 앞 대로변에 있다. 지방에서 상경한 아버지가 대장간을 만들고, 아들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다른 대장간과는 달리, 이곳은 서울 모래내(남가좌동) 출신 형제가 대장간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이 아닌 제자를 양성하여 후계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후계자 박한준은 1986년생으로,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강의를 듣고 대장간 일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됐다. 인터넷으로 알아본 대장간은 실생활에서 직접 쓰는 물건을 만든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대갈을 옛날에 망치로 때렸다가 뽑아서 잘라서 머리를 만들었는데, 장위동은 메질로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뚝 ‘자르면 내가 머리를 만들었어요.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가다’라 그러는데 여기에 쇠를 넣고 망치로 때리면 뾰족해지는 원리예요. 장위동에서 일할 때 제기동으로 소 편자 박으러 다녔어요. 당시 제기동에 원목을 실어 나르는 소가 엄청 많았는데 편자를 한번 박으면 일주일을 못 갔어요. 시골은 소를 짚으로 많이 신겼는데, 서울은 옛날에도 편자를 박았어요.
류상준 형제대장간
대장간은 사면 중 한 면이 별도의 출입문이랄 게 없이 뚫린 개방적인 공간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 때문에 대장간 운영은 자연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대개 오전 7시 반에 문을 열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운영한다. 해의 길이에 따라 문을 닫는 시간이 유동적이어서 여름에는 오후 8시, 겨울에는 오후 6시까지 영업한다. 정오를 전후해 점심을 먹는다. 상시 불을 쓰는 일이기 때문에 일 년 중 2월부터 4월까지가 일하기 가장 좋고, 덥고 추운 여름과 겨울이 가장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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